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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10 16:43
홍천의 강남 연봉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520  
홍천의 강남 연봉리



지금 많이 변한 연봉리의 모습을 1950년대와 비교하여 어떻게 표현하고, 이것으로 길이 남을 자료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도록 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을 하려 보니 글 재주가 없는 터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걱정이다. 그 당시의 사진을 수집해 보려고 노력 해 보았지만

허사(虛事)였고, 다만 읽어 주시는 여러분이 이 내용을 토대로 상상하며 이해 해 주셨으면 한다.



나는 본적이 연봉리 150번지다. 위치상으로는 지금 동국 주유소 옆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촌면 물걸리 출신이시고, 우리 어머니는 내촌 화상대 출신이시다.

따라서 내 위의 형제들은 모두 내촌에서 출생하셨지만, 부모님이 읍으로 이사 나오시는 바람에 나서부터는 홍천읍에서 태어났다.

내가 연봉에 살기 시작 한 것은 1959년 초등학교 1학년 2학기쯤이 아닌가 기억난다.

연봉은 홍천군 현내면 지역으로 조선조때 보안도에 딸린 연봉역이 있었던 곳이었기에 연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배무기, 관텃골, 절골,밤나무골을 합하였고, 홍천에서 서울, 원주로 갈라지는 무궁화 공원 앞에서 3거리를 이루며 옛날 연봉역이 있었고 군경 합동 검문소가 있었었다.

6.25전쟁이 끝 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인지라 우리나라 전체가 거의 기아선상에서 헤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골인 홍천은 더 말 할 나위 없겠지만, 연봉리는 그 당시 가난하고, 사업에 실했다면 연봉으로 이사 오는....다시 말해서 빈민이 많이 사는 곳으로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너무 생활이 어려워 장전평리, 삼마치리등 산에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장작을 팔아 생활을 해야만 했는데 정말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았다.

나뭇꾼들이 산림 간수 눈을 피하기 위해 해가 저물 때까지 관터고개밑에서 기다리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이 지서의 망을 보고 와서 기회를 틈타 지서를 잽싸게 뛰어서 통과를 해야만 했다.

만약에 재수없어 걸리는 날에는 나무는 물론 톱, 낫등 나무하는 도구는 모두 압수 당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길은 모두 비포장 신작로였고, 차가 지나가면 먼지로 뒤 덮이지만 그래도 당당히 걸어갔던 기억이 나고 중고등학교 때에도 흰 교복을 입고 다녔으니, 하루에 한번 이상은 교복을 빨아 입어야 했다.

연봉다리는 6.25때 폭탄에 맞아 가운데가 끊어진 다리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 새로 건설된 다리가 있어서 지금처럼 나란히 두 개의 다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끊어진 다리를 보수하여 인도로 사용하고 있는것이다.





연봉다리(홍천교) 밑 화양강에는 여름철 만 되면 홍천읍민이 어린이고 어른이고 간에 모두 나와 수영을 일삼 던 곳이었고, 다리위에서 다이빙 할 정도로 물 깊이가 있었다. 그래서 익사 사고도 많이 있었다. 이사 사고가나면 다리 위에선 많은 구경꾼들이 내려다보면서 시체를 건지러 간 사람에게 위치를 알려 주기도 했다. 주로 어린이가 많았는데 업어져있으면 남자이고, 누어 있으면 여자라는 것을 그때 알었는데 왜 그럴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는 주로 강변엔 백사장 모래가 많이 있어서 좋았고, 보트 대여하는 사람도 있어서 보트도 빌려 타기도 했는데, 어쩧거나 지금보다 평화스럽고 강변의 모습이 마치 해변가를 연상하게도 했다.

연봉다리밑 겨울의 모습은 마치 동계 올림픽이라도 열리는 것처럼 수시로 관내. 도대회,전국대회등 빙상대회가 종종 열렸고, 특히 사단 빙상대회가 열리는 날에는 홍천군민도 함께 관람하며 응원하는 장병들의 모습에 즐겁게 보냈다.



연봉다리(홍천교)를 건너면 연봉리가 이어지는데 좌측에는 바로 강변 뚝을 연게하는 좁은 길이 있었는데 위에서(지금의 남산 공원) 내려오는 도랑을 건너기 위해 비탈로 내려가서, 다시 올라간 다음 쭉 가면 지금의 아이파크 밑으로 나가게 된다.

지금의 아이파크 위치는 그 당시 한일제사 공장이 있어서 홍천군내 시골에 있는 아가씨들이

300명 이상 근무를 하였고, 자동차가 없는 출퇴근 시간에는 연봉리가 복잡 복잡했었다.

기숙사가 없어서 자취하는 여자들이 많았기에

동작 빠른 젊은 녀석들은 공장에 근무하는 아가씨와 연애도 하고, 그 계기로 결혼한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측도 마찬가지로 강변 뚝을 가기위해 길에서 비탈지게 내려와야 했고, 뚝을 따라가면 지금의 송학정 건너편에 통신대와 802병기부대가 있었는데 통신대까지 뚝이 형성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좌측으론 그 좁은 길을 새롭게 넓혀 상가와 아파트가 건축되어 그때의 기억도 잊혀버릴 것 만 같다.

삼호아파트 뒷 쪽으로 주물공장이 있었고 가는 길은 한전 앞으로 하여 삼호아파트 쪽으로 가는 신작로를 통해 한일제사 공장으로 가고 갈마곡과 동면으로 연결된 길이 있었다.

집은 몇 채 안 됬었고, 그 쪽은 모두 사과 과수원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오면 좌측으로 개풍관이라는 요정이 있었고, 그옆에는 여인숙이 있었다. 그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어서 그 동네 아이들의 놀이 터였다. 그 위로 조금 올라가면 허 씨가 운영했던 이발소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연봉여인숙과 구멍 가게가 있었으며 지금 있는 동국 주유소도 70년대 초에 생겼다. 밑으로 내려가면 옹기 그릇을 만든 옹기터가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올라오면 옛날에 고무신과 잡화등을 팔았던 문광상회가 있는데, 친구인 덕중 아버지가 운영을 해 오시다가 90년대 홍천을 떠나셨고, 옆 골목안으로는 대포집 같은 것이 있었으며, 나중에는 또와 식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다른 사람이 운영 해 왔었다.

문광상회 옆에는 선배 김진규 아버님이 행정사법 서사도 하시며, 가게를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고, 그 옆에는 우리가 많이 다녔던 호떡과 빵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통신대로 들어가는 신작로가 좁게 있었고, 친구 아버님이 하시는 고물상과, 군인들 상대로 하는 양복 수선집이 있었으며, 지금의 한림정은 엿 공장 자리였다.

다시 원 위치로 와서, 빵집 위로는 국수를 만들어 팔던 가게가 있었는데, 우리 집은 이 집의 단골 중에 한 집이었을 것이다. 그 바로 옆 지금 한국전력 자리는 연봉 변전소와 관사가 있었는데 지금 00 레미콘 사장 김00 선배님의 아버지가 소장으로 계시지 않았나 싶다.

변전소를 지나 지금도 있는 방앗간이 있고, 그 다음은 빵을 만드는 거북당이 있었다.

그리고 나무꾼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검문소는 지금의 원주와 서울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등산로 가는 길은 조금한 저수지를 지나 서낭당을 거쳐서 가게 되었었고, 그 길로 넘어가면 동면 방향과 삼현리로 연결되어 그 쪽에 사시는 분은 읍에서 장을 보고, 종종 그 길을 이용하시기도 하였다.

지금의 현대 아파트 쪽 상가는 그 때 사과 과수원이 많았고, 영안모자 공장과 세무서 자리는 내가 가장 무서웠던 공동묘지였었다.



이제 40년이 지난 지금 연봉은 홍천의 중추적인 곳이 되었다.

우선 인구가 09년도 11월말 기준 통계를 보면 홍천읍 총인구35,840명(남18,083 여17,757) 중에 9,868명으로 증가, 홍천읍 인구의 27.5% 가 거주하여 1973 년도에는 남산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사과밭과 논들이 변하여 아파트, 주택단지, 공장과 미래의 산업단지로 변하였다.

뿐만아니라 연봉에 사는 주민들이 건강 회복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활동하는 등산로가 있으며 공원이 생겼다.

도로(道路) 역시 이곳저곳 불편하지 않게 연결되어 있어서 좋고, 대중음식점을 비롯하여많은 접객업소가 있으므로 홍천의 상권도 연봉리에 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년대 우리 시절에는 연봉리를 서울의 영등포라고 우스게 소리도 했지만 ,이제는 연봉리를

홍천의 강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도 연봉리는 생명 연구단지를 비롯, 크고 작은 공단이 더 설립되겠고, 발전될 요지는 무궁무지하다. 연봉의 발전이 곧 홍천군의 발전이 아닌가 말하고 싶으며, 두서 없이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