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잡기전(실경산수화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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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잡기전(실경산수화정신)

관리자 0 1,906 2020.04.01 17:50

붓을 잡기전

 

                 마종운(馬鐘云) 의 著書 [한국의 산수화] 의 책머리말 글에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의 역사적(歷史的) 정신(精神)

 

우리나라에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가 태동(胎動) 되었던 것은 고려 인종조(1122-1146)에 활약했던 이영(李寧)이 예성강도(禮成江圖)와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등을 사생(寫生)으로 그리면서 이를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라 명명(命名)하게 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조선왕조 후기 정선(鄭敾)(1676-1759)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와 직접적인 연결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회화(繪畫) 사상 차지해온 의의(意義)는 매우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나타난 정선(鄭敾)시대의 회화경향(繪畫傾向)으로는 남종화(南宗畵).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풍속화(風俗畵). 등이 많이 그려 졌으며 이 밖의 한편에서는 서양화(西洋畵)의 수용도 새로운 경향(傾向)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서양 화법(畵法)은 조선초기(朝鮮初期)와 중기(中期)의 화풍을 계승(繼承)한 화가들이 주로 수용하였음으로 이시대의 서양화식 풍경화가 정선의 실경 산수화 로 재(再) 탄생(誕生)하는데 큰 영향(影響)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推測) 해본다.

 

서양화식(西洋畵式) 산수화(山水畵) 풍경화(風景畵)라면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이 현지(現地)풍경에 접하여 사생(寫生)으로 제작(製作)되는 것을 원칙(原則)으로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 동양화 양식의 산수화도 사생(寫生)을 원칙으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대(歷代) 남종화(南宗畵) 화가들은 회화의 출발이 문인화로부터 시작 되었던 점을 지적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의(寫意) 심화(心畵) 문기(文氣)등 정신적 발상을 우선으로 하는데 에서 현장에서 직접 사생하는 것 보다는 관념(觀念)으로 제작 하는 경향이 많았음을 고화들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중국과의 교류에서 들어온 선택된 화풍을 모사(模寫)하기에 급급했던 화가들도 적지 않았다.

 

이미 중국의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사혁(謝赫)은 화론육법(畵論六法)을 서술(敍述)하여 제 일번을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 정해 놓았다. 그림이란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닌 자기 정신세계(精神世界)의 범주(範疇)로써 스스로 터득 해 나가야 하는 것으로 사물을 보고 많은 시간을 면밀(綿密)히 관찰(觀察)한 다음 그리기 작업(作業)에 들어가고 이 작업 과정(過程)을 반복(反復)하는 순간순간 대상물(對象物)과 교감(交感)하여 상응(相應)하게 되며 동시(同時)에 자기정신(自己精神) 은 대상물(對象物)의 외형(外形) 으로 그 외형의 감흥(感興)은 다시 사물(事物)의 내면(內面)으로 반복(反復)하면서 영감(靈感)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영감(靈感)은 다시 예술가(藝術家)의 손을 통해 창조적(創造的) 이미지(image)로 결국 새로운 창조물(創造物)의 위대한 예술작품(藝術作品)을 탄생(誕生)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실경(實景)을 통해 정신적(精神的)으로 연결되는 것이 산수화(山水畵) 이고 보면 역대(歷代) 화가(畵家)들도 이를 바탕으로 그려 왔음이 분명(分明)하다는 것을 밝혀 두는 것 이다.

 

위에서 살펴본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가 우리 손으로 그려지게 됨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또 한편에서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의 심한 피해이며 또 하나는 6. 25.의 참상(慘狀)이다. 이들로 인하여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는 물론이고 제반 미술문화(美術文化)가 침체(沈滯)를 면할 수 없었던 상태가 되면서, 갑자기 서양미술교육(西洋美術敎育)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6. 25.직후 되찾은 땅에는 다시 국전(國展)이 부활되고 그 당시 적은 수의 동양화(東洋畵) 화가(畵家)들에 의해 사사 형식으로 다소의 동양화 화가들이 배출 되었는가 하면 국전(國展)을 통해서도 이들의 문하생(門下生)들은 물론, 그 외 많은 미술학도(美術學徒)들을 구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우리나라의 주체적 의미(主體的意味)에서의 회화(繪畫)정립은 미흡(未洽)하기 그지없었다.

 

해가 가면 갈수록 비대(肥大)해지는 국전(國展)의 부작용은 그림에 열중 하면서 순수한 자기세계에 몰입(沒入) 하기보다는 아예 국전스타일(國展style)이라는 화풍(畵風)을 제작하여 아주 좁고 좁은 문 앞을 기웃 그려야 하는 화가지망생들이 줄을 이었다. 좁은 문을 열지 못하고 밖에 서성이게 되는 곳에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급기야 그림계 에는 국전파와 비국전파 라는 아름답지 못한 말들이 돌았든 것도 사실이었다.

 

소위 몇 대 화가들에게서 전수(傳受)되는 동양화(東洋畵)는 대부분 산수화(山水畵) 일색인데 이때에 성행하든 산수화를 보통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라는 이름이 붇처저 틀에 밖은 것 같은 모사품(模寫品)위주의 동양화(東洋畵)가 많이 그려졌다. 이와는 대조적(對照的)으로 반 의무화된 서양화 미술교육(西洋畵 美術敎育)은 체계(體系)있으면서도 당당하게 발전해 나갔으니.... 우리문화의 주체성(主體性) 차원에서 본다면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현상(現象)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렇지만 이미 깊이 박힌 우리 동양화(東洋畵)의 뿌리는 뽑힐 수도 버려질 수도 없이 모질게 자라날 수밖에 없었든 것 이다. 이는 곧 우리 풍토(風土)에 맞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누가 붙잡아 주지 않아도 자연(自然)스럽게 스스로 그가 자라난 것이다.

 

흐르는 역사(歷史)는 1980년대로 성큼 들어서면서 그해 10 월전을 마지막으로 국전은 문을 닫았고 , 그와 대등한 미술공모전(美術公募展)이 등장하고 사회경기는 고소득(高所得)으로 급변 하면서 예외 없이 많은 화가(畵家)들이 배출되었다. 이에 따라 미술품(美術品)애호가도 상당수로 증가 하면서 일반적으로 동양화에 대한 인식도가 향상 되어가는 추세를 짐작케 하는 그림 계는 일대(一大) 호황(好況)기 맞았었다는 것을 기억 해 본다.

 

동양화(東洋畵)의 개념이 한국화(韓國畵)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동양화(東洋畵)인지 서양화(西洋畵)인지 구별이 안 되는 실험 작이 젊은 미술학도(美術學徒)들로 부터 성행(盛行)했으며 다양(多樣)한 화풍을 하나로 정리라도 하려는 듯이 모두 통칭하여 회화(繪畫)로 불리기를 원하는 전문인도 많았다.

 

이렇게 다양화(多樣化)된 동양화(東洋畵)안에서 절반이상의 자리를 항상 유지(維持) 해온 것이 바로 이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인데 이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풍토에 맞는 자연(自然)이 연결(連結)지어준 인연(因緣)의 깊은 뿌리가 자리한 불변의 원칙이라 할 것 이다.

 

80 년대의 국전(國展)을 끝으로 한 전. 후로 10 년은 산수화의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었든 시기이다. 이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바람이다. 많은 한국화 화가들은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를 탈피(脫皮)해야 한다는 의미(意味)를 터득 한 듯 자연(自然)에 순응(順應)하며 그의 부름에 화판을 들고 대자연 앞으로 다가서게 되었으며 생동(生動)하는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를 깨다를 수 있었고 삶의 의미를 의식 하게 된 것 이다. 다른 화가들의 화선지(畵仙紙)에도 본인의 화선지에도 사생(寫生)의 먹물이 수 없이 적셔지며 정진(精進)하며 더욱 훌륭한 작품(實景山水畵)은 한국화 라는 이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든 것이다. 실제(實際)산을 보고 그려야 산수화(山水畵)라는 동양화(東洋畵) 화가(畵家)들의 기운(氣韻)이 유행(流行)처럼 번져나가든 30 여 년 전이 3 개월 전같이 짧은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실내(室內)에서 그리는 것과 달리 밖에는 일기(日氣)의 변화(變化)에 따라서 그렇고, 현장(現場)에 까지 가야하는 불편함 과 그 외 그리기에 적합한 시간을 내본다는 것 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산수화 화가들은 과연 평생(平生)동안 몇 장의 사생(寫生)을 했을까? 화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두들 아쉬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며, 이의 뒤를 따르는 후학(後學)도 같은 생각으로 사생의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나 하는 염려(念慮)를 해 보는 것이다.

설사(設使)사생의 경험(經驗)이 있다 해도 현장에서 실기(實技)가 여의(如意)치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要素)는 사생을 위한 기초(基礎) 부분연습(部分練習)의 부족이다. 대상물(對象物)의 표현방법(表現方法)은 어렴풋이 생각나지만 막상 붓을 잡으면 손이 말을 않 들으니 사상전(寫生前) 기초(基礎)를 더많니 다져야 한다는 것을 절감(切感)하게 될 것이다. 이제 실경산수화는 보편화(普遍化)되여 있었고, 이미 그림 애호가들 눈에는 감상의 대상을 찾아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수준에 달하면서, 반면 아직 까지도 산수화 화가지망생(畵家志望生)들 손에는 익숙하지 않은 이런 저런 필법의 요행(僥倖)이라도 있지 않나 해서 접근이 쉬운 평생학습관 등을 찾아다니며 배우기를 원하지만 여기 저기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기법에 혼돈(混沌)만 가져올 뿐 확고(確固)한 일체감(一體感)이 성립되지 않는다. 첫필에 나타나는 차이가 하나로 보일 때까지 다량 수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이 실경산수화의 기법(技法)이기도 하다.


필자역시 먹을갈면서 머리말에서 말했 듯이 한국고찰을 대작으로 3 년이상 제작했든 전 후로 많은 연구와 습득을 게울리 하지않았다. 그후 고찰전시를 계기로 소위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되엇고 주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부문 강의(講義)를 하면서 많은 문하생과 함께 더불어 연구(硏究)하며 한국인과 산수화의 정신의 연결이 무었에의해 이루어지는지를 어느정도 얻어낼수 있었다.

 

배우며, 가르치며, 후학(後學)과 함께 연구(硏究)하며 터득(攄得)한 알찬 실기내용(實技內容)의 자신감(自信感)과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후학의 산수화 그리기 열성도(熱性度)에 반하여, 보다 쉽게 배워 나갈 수 있는 기법(技法)의 길잡이로 한국의 산수화 란 이 책을 지어보게 된 것 이다.

 

흐르는 시류(時流)에 따라 동양화(東洋畵)가 한국화(韓國畵)로 산수화(山水畵)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란 이름으로 필자(筆者)의 젊음은 노세(老歲)로 변하면서 많은 사람들로 부터 한국화(韓國畵)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質問)을 많이 받는다. 대답은 “현대(現代) 한국 사람의 정신문화(精神文化)와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화(韓國畵)는 서양화(西洋畵)를 부분적(部分的)으로 받아들여, 그려진 동양화(東洋畵)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作家)는 반듯이 한국 사람이 그려야 한국화(韓國畵)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反面)에 서양화(西洋畵)도 한국 사람이 그리면 한국화 일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지만 , 미국말을 잘하고 미국에 산다고 근본이 같은 미국 사람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근본을 가지고 살아야 자존심을 발휘(發揮)하는 것으로 근본(根本)을 잃음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회화사상(繪畫思想)의 근본(根本)은 각기 자기 나라의 풍토에서 얻어 만들어진 자료 와 근본정신 그리고 기법의 기술 이렇게 삼위일치(三位一致)가 회화로 창작되어지는 것을 실제 창작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서양의 기름과 동양의 물, 서양의 유광(有光) 껍질, 동양의 무광(無光)의 은은 함. 이러한 이점(異點)도, 동. 서양화로 구분되어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회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본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는 정신적(精神的)으로나 실질적(實質的)으 로 동양회화(東洋繪畫) 사상(思想)의 근본이 됨은 물론 순수한국화(純粹韓國畵)의 중추적 역할로 영원불변(永遠不變)의 예술(藝術)로 살아 숨 쉴 것을 확신하며 이제는 구지 실경(實景)이란 설명적 언급을 생략(省略)하고 통념적(通念的)인 『산수화(山水畵)』혹은 『풍경화(風景畵)』의 개념(槪念)으로 존재(存在)하여야 할 것이다. 





13-06-1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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