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갈면서 (문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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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갈면서 (문인화)

관리자 0 1,851 2020.04.01 17:49

붓을 잡기전

(마종운(馬鐘云)  저서(著書) [한국의 문인화]책의 머리말 글 에서)

 

문인화(文人畵)의 역사적(歷史的) 정신(精神)

 

문인화(文人畵)를 몇마디로 요약하면 , “전문적인 화가가 아닌 사대부층 사람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이다.” 라고 알고 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 해야하는 어려운 면이있다. 이는 인간(人間)의 정신세계(精神世界)와 작품(作品)의 정신적(精神的)인 내면의 관계가 연결 지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선비나 사대부들이 여기로 자신들의 정신세계을 그린 그림으로 사인화(士人畵) , 사대부화(士大夫畵)· 문인화(文人畵)란 이름으로 국한(局限) 되어 있었다면, 현대는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는 것 이고 보면 특정인의 예술세계가 대중화는 아니드라도 온고지신(溫故知新) 이란 의미에 부합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공감 할 수 있는 문인화 정신을 새롭게 배워나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역사의 변천(變遷)에 따라 인간의 정신문화(精神文化)가 달라 질수 있으나 불변의 뿌리가 있다는 원칙에서 변화된부분과 올바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이 연구대상인 것이다. 중국의 역대 육조시대 사혁(555)의저서 고화품록에 화론육법을 서술하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평가하는 양법에 훌융한 참고가 되는 법으로 이의 의미는 먼저 정신적인 면을 열거한다. 그후 당 나라시대의 시인이며 화가인 왕유(699~761)로부터 수묵의 정신예술이 탄생하게 되면서 육조의 사혁은 부(父)로 비유할수있다면 왕유(王維)는 모(母)가 될수 있는 것으로 비유 해본다.

 

이렇게 이미 문인화가 태동하여 이름을 지어부르게된 것은 육조의 화려한 문화에서 수 당 송 원 명나라로 천년 세월의 역사속에서 인간과 고락(苦樂)을 함께하며 문인화(文人畵)의 정신세계는 더욱확고하게 자리하게된 하편 중국역대 말기로 접어들며 관료사상(官僚思想)이 권위 주위로 치닫고 이에반해 선비사상(思想)은 약화 되어갈 즈음 정신적인 문인화와 생활미술, 화원의 원체화풍,등 약간은 복잡한 양상의 회화사(繪畫史)의 혼란기(混亂期)를 맞는다.

 

이 혼란기에 맞추어 명말(明末)의 서, 화가 동기창(董其昌)(1555) 은 그림계의 방향을 확실하게 정리를 하기에 이르게되며, 이는 남종화(南宗畵) 북종화(北宗畵)을 제창(提唱)하였고 각각 창시자(創始者)를 정하니, 남종화는 왕유(王維) 북종화(北宗化)는 이사훈(李思訓)으로 했다.

 

정신적인면에서는 남종화를 문인화 편에 원체화풍(院體畵風)이나 도식적인 종교화(宗敎畵)등 생활미술(生活美術)은 북종화로 정리를 하면서 제각기 자리를 하게된다. 동기창이 남북종화를 제창한 유래(由來)는 달마(達磨)의 후계에 혜능(慧能)의 문득 득도(得道)할수 있다는 교리(敎理)의 남종선(南宗禪)을 남종화(南宗畵)로, 반면에 신수(神秀)가 펼치는 교리의 득도(得道)는 절차와 계통을 순차적으로 하여 많은 불경을 외우고 천만배 지성(至誠)으로 정성을 다하여 조금씩 얻어나갈수 있다는 북종선(北宗禪)을 북종화(北宗畵)로 정한 것이다.

 

사실상 문인화정신의 핵심적인 문제는 “문득 득도(得道)” 할수있다는 남종선(南宗禪)안에 있다. 화가(畵家)의 본심(本心)을 받아내어 화선지에 저장(貯藏) 하는 것은 지(紙) 필(筆) 묵(墨)삼위일체가 사람이 행하는 무의식의 순간만을 차곡차곡 저장하며 한폭의 문인화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의식(無意識)이란 오직 일필(一筆)의 순간(瞬間)에서 이미 정해진 아주 단순(單純)한 형태 외(外)에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일련(一連)의 행위에서 생성하는 문인화의 정신을 다시 끝장쪽으로 넘기어 결론을 지어보기로 하고 다시 동기창시대 이후를 살펴보기로한다.

 

그후 동기창시대에서이어 芥子園畫傳 (3집 17권) 이란 남종화 백과사전이라해도 될만한 책이나오게된다. 중국 청(淸)나라 초기(初期)의 화보로 1679년의 이어(李魚)의 서문(序文)이 있는 초집(初集)은, 명(明)나라의 이 유방의 『산수화보』를 왕개가 증보 정리한 것이고 이집과 삼집은 왕개 형제(兄弟)가 속편(續編)한 화조(花鳥)의 화보로서 1701년에 간행(刊行)하여 남종화(南宗畵)의 본보기로서 소중하게 자리하게된다.

 

반면에 한국의 고려 시대의 문인화사를 살펴본다면 개자원화전(芥子園 畵傳)이 나오기전 이미 고려 중기(12세기경)에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에 의해 묵죽과 묵매가 처음 그려졌다고 전해지고 고려 후기에는 새로운 문화담당층의 능문능리형(能文能吏型)의 문사들을 통해 특히 묵죽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고 이시대의 정홍진(丁鴻進)은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다고 한다.

 

한국에의 고려시대(高麗時代) 문인화 유작(遺作)은 남아있지 않으며, 조선(朝鮮)초기(初期) 작품으로 일본에 있는 사이후쿠지(西福寺)의 관경서품변상도(觀經序品變相圖)속의 누각 안에 있는 병풍그림에 묵죽(墨竹)과 해애(海涯)의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중의 묵죽(墨竹·墨梅)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초기(1392~1550)에 새로운 시대의 사대부상의 정립을 위해 군자적 인품을 상징하는 문인화(사군자) 그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으며,

조선 중기(1550~1700)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나고 사대부 사회가 분열되는 고난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화풍이 완성되는 발전을 이룩했다. 묵죽은 조선 제일의 명가(名家)인 이정(李霆)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자연미와 이상미가 융합된 사생적 필법의 구사와 서정적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조선 후기(1700~1800)에는 중기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여러 분야의 복구사업을 기반으로 영조·정조 시대에 새로운 문화가 꽃을 피웠는데, 이때부터 명말 이래로 중국화단을 지배해온 남종화풍이 당시화보(唐詩畵譜)개자원화전(介子園畵傳) 같은 화보류 등이 들어오면서 사의적(寫意的)인 정신예술의 화풍이 크게 대두되었고, 비로소 조선의 문인 묵객들은 남,북종화의 구분을 이해할수 있었으며 이에따라 문인화정신을 공부하고 동시에 모든 그림에 내재(內在)한 정신적인 면의 작품성 유(有)무(無)을 판정해야하는 어려운 문제를 않고 있었다.

 

문인화 정신의고결한 품격은 이미 들어 알지만 경험이 짧은 낮은 눈으로는 평가의 오류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우여곡절이 문인화를 조선말에 들어서면서 정착하게되며 이시대의 대표화가는 강세황(姜世晃) · 이인상(李麟祥) · 심사정(沈師正) 등의 남종 문인 화가 이며, 문인화의 화풍을 절정에 올린 인물은 김정희(金正喜)라 할 수 있다. 특히 강세황(姜世晃)은 남종문인화풍을 그지없이 부드러운 일필일획으로 생동감 넘치면서 깔끔하고 담백한 화풍을 구사하여 자리를잡고 후학들에게도 큰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단순한 여기적(餘技的) 산물이 아니라 그의 정신세계와 기교(技巧)가 합해진 문인화풍으로 허필(許泌)·임희지(林熙之)·윤제홍(尹濟弘)·신위(申緯) 등을 거쳐 조선말기화단으로 계승되었으며, 조선 말기(1800~1910)에 문인화 그림은 상층문화의 확산현상과 청대(靑代) 문인화가들에 의해 크게 발전된 수묵화훼화(水墨花卉畵)의 유행 등을 배경으로 더욱 문인화가 성행하여 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직업화가(職業畵家)까지 출현(出現)하기시작했다.

 

이제 문인화그리기는 어느특정인들의 것이아니고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게 보편화(普遍化) 되어있는 분위기(雰圍氣)로 멀지않은곳에있는 문화쎈터 교육장을 들 수 있다. 거의전부 문인화반이 개설되여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고결(高潔)한 품격(品格)의 문인화 정신이 적당히즐기는 취미(趣味)의 손끝에서 붓끝으로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숨기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문인화의 정신세계는 환상같은 것이 아니다. 가장 쉽고 순수하것이라는 것을 필자는 알아냈으나 거의평생을 그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여 어두운 곳 으로만 헤매다 되돌아와 알게 된 것이다. 늦은감은 있으나 그림은 잘그리고 못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다행이라 생각 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고 있다는 행복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매사가 그렇듯이 우선은 문인화의 정신세계를 믿어야 한다. 믿음의 바탕에서 작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낼 때 만이 숨쉬는 분신의 작품이 탠생하게 될 것이다. 즉 욕심을 덜어내고 일필(문득) 일필(문득) 부담없이 그려 나가되, 개칠만은 않되며 항상 살아있는 필치로 그려야 한다. 살아있는 필치란? 잘못 그려진곳에 있을 것이며 잘 그려진 곳에는 다른 사람의 정신으로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잘 그리고자 하는 욕심보다는 그리는 행위를 자랑으로 여기기 바란다.

마 종 운 씀 





13-06-1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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