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잡기전
사군자(四君子)
한국에서는 12세기 무렵인 고려 중기에 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에 의해 묵죽과 묵매가 처음 그려졌다. 이러한 흐름은 고려 후기를 통해 새로운 문화담당층으로 등장한 능문능리형(能文能吏型)의 문사들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으며, 특히 묵죽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정홍진(丁鴻進)의 경우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사군자 그림은 독립된 유작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 사이후쿠지[西福寺]에 있는 〈관경서품변상도 觀經序品變相圖〉 속의 누각 안에 있는 병풍그림의 묵죽과 해애(海涯)의 〈세한삼우도 歲寒三友圖〉 중의 묵죽·묵매를 통해 조선 초기 화풍의 선구적인 특색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초기(1392~1550)에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한 사대부상의 정립을 위해 군자적 인품을 상징하는 사군자 그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으며, 묵죽의 경우 화원들 시험의 1등 과목으로 채택될 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 시기의 묵죽 양식은 가는 줄기에 상대적으로 잎은 크면서 폭이 좁고 끝이 길고 날카롭게 빠진 모습으로 묘사되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묵매는 생략된 구성, 줄기와 가지의 직선적인 묘사, 먹빛의 강한 대조 등을 통해 한국적인 특징을 형성했다.
조선 중기(1550~1700)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나고 사대부 사회가 분열되는 고난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더욱 심화·발전되어 조선화(朝鮮化)했으며, 사군자 그림도 매·난·국·죽의 4화목이 갖추어지고 묵죽과 묵매를 중심으로 한국적 화풍이 완성되는 발전을 이룩했다. 묵죽은 국조(國朝) 제일의 명가인 이정(李霆)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자연미와 이상미가 융합된 사생적 필법의 구사와 서정적 분위기의 연출에 특히 뛰어났던 그의 화풍은 동시대의 김세록(金世綠)·조익(趙翼)·허목(許穆)·이급(李伋)과 후대의 유덕장(柳德章)·송상래(宋祥來)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묵매에서는 간일한 직립식 구도와 직선적 필획, 짙은 먹점들의 규칙적인 배열 및 매화의 성근 모습으로 요약되는 전형을 수립했다. 이 시기에 이부인(李夫人)·송민고(宋民古)·조속(趙涑) 등 많은 명가들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몽룡(魚夢龍)의 명성이 가장 뛰어났다. 묵란과 묵죽에서도 선조(宣祖)와 이징(李澄)·홍진구(洪晋龜) 등의 활약으로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1700~1800)에는 중기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여러 분야의 복구사업을 기반으로 영·정조 연간에 새로운 문화가 꽃을 피웠는데, 특히 청조(淸朝)의 문물을 중화(中華) 전통의 계승으로 간주하고 후기 문화의 부흥을 위해 적극 수용함으로써 회화분야 전반과 함께 사군자 그림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명말 이래로 중국화단을 지배해 온 남종화풍이 〈당시화보 唐詩畵譜〉·〈개자원화전 介子園畵傳〉 같은 화보류 등을 통해 일반화되면서 사의적(寫意的)이고 서예성이 강조된 화풍이 크게 대두되었고, 또 매·난·국·죽을 함께 묶어 사군자란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강세황(姜世晃)은 사군자 전종목을 한 벌 그림으로 의식하고 그린 최초의 작가로서 남종문인화풍의 부드러우면서도 서예적인 필획이 살아 있는 붓으로 깔끔하고 담백한 화풍을 이룩했으며, 당대와 후대의 문인 및 직업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강세황의 이러한 경향은 단순한 여기적(餘技的) 산물이 아니라 그의 예술세계와 기예가 응집된 것으로 허필(許泌)·임희지(林熙之)·윤제홍(尹濟弘)·신위(申緯) 등을 거쳐 말기화단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말기(1800~1910)에 사군자 그림은 상층문화의 확산현상과 청대 문인화가들에 의해 크게 발흥된 수묵화훼화의 유행 등을 배경으로 더욱 성행하여 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직업화가까지 출현했다. 이 시기에는 후기 남종문인화풍이 더욱 보편화되면서 서예성과 사의성의 강조와 함께 문기(文氣)와 서권기(書卷氣) 같은 이념미가 크게 중시되었다. 그리고 청대의 수묵화훼화풍 중에서 정섭(鄭燮)·금농(金農)·나빙(羅聘) 등 양주8가(揚州八家)의 참신한 구도와 분방한 붓놀림, 독특한 조형미와 담채의 효과를 이용한 새로운 감각의 개성적인 화풍도 널리 보급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것은 김정희(金正喜)와 그의 제자들인 이하응(李昰應)·조희룡(趙熙龍)·신관호(申觀浩)·허련(許鍊) 등과 같은 추사파(秋史派) 화가들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묵란화가 크게 성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 초기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조선총독부에 의해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서 서예와 함께 사군자 그림이 독립된 전문분야로서 중시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선전에서 출품부가 없어지는 등 전반적으로 침체되기 시작했으며, 그림 자체도 새로운 삶의 의식을 반영하는 근대적 표현방법으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못한 채 전통고수와 답습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점차 구시대의 유물로 퇴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으며, 선전 후기에 없어진 사군자부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美術展覽會)에서 부활되었지만 서예부에 편입됨으로써 서예의 부수적(附隨的)인 종목으로 인식되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
又濟 馬 鐘 云 書
13-06-11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