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찬은 1885년 11월 24일 강원도 홍천현 영귀미면(현 홍천군 동면) 성수리에서 사헌부감찰을 지낸 아버지 민봉식(閔鳳植)과 어머니 영해 박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일 동면 성수리에서 여흥 민씨 문중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태극기 2,000여 매를 만들어 속초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에게 배부하고 면사무소 국기계양대에 손수 태극기를 계양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홍천읍내로 행진하려다 동면장인 민병선(閔丙善)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튿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3일 면사무소 앞에 다시 모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군 헌병의 습격을 받아 비로소 민병선에게 속았음을 알고 일본 헌병대와 격투를 벌이다가 민병태,민병숙 (독립운동 애국장 추서)형제는 현장에서 순직하자, 내촌면 도관리 김덕원 동지의 은신처로 피신했다.
민병찬은 이날 밤 홍천군 내촌면 도관리에서 김덕원(金德元)과 같이 산 봉우리 8군데에 봉화를 올리고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벌인 후 김덕원의 사촌동생 집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및 방화 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춘천형무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8월 8일 전.답 8,500평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만들어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인 민필호와 함께 했다. 1926년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병을 얻어 귀향길에 올라 통천까지 왔지만 병이 악화되어 거동을 하지 못하게 되자 종친들에 의해 들 것으로 14일만에 고향 집에 도착했지만 이틀 후인 6월 28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민병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 (387호)에 안장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민병태·민병숙 형제는 그의 6촌 형(재종형)이며, 독립유공자 민병두는 10촌 형이다.
자료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