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사(侍御使)를 거쳐 1241년(고려 고종 8)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만들 때에 사업을 총괄 지휘하였다. 강원도 홍천(洪川)에 용수사(龍遂寺)를 창건하였다.[1]
시조 용득의(龍得義)는 1208년(희종 4)에 시어사(侍御史), 1241년(고종 28)에 문하시중(門下侍中), 1271년(원종 12)에 통어사(統御史)를 역임하였다. 1236년(고려 고종 23년)부터 38년까지 16년동안 1차 몽골의 난 때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소실되었던 것을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고종 12년까지 30년간을 최고행정관으로 지내면서 재 각판을 지휘했으며, 총 경판수 8만 1258판에 달하는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각판하는 불사를 지휘하였다. 1241년(고려 고종 28년) 영상(領三台事)에 올랐으며 항몽적인 세력이 정리되면서 벼슬에서 은퇴한 후 홍천군 북방면 장항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금학산에 용수사(龍遂寺)를 세워 중생에게 희망을 갖게 하였으며 불도들의 수련도량으로 학서루(鶴棲樓)를 창건하여 경서(經署)와 시례(詩禮)를 강(講)의하셨으며, 다사(多士)와 준재(俊才)를 많이 육성하였다고 한다.[1]
{{성씨 정보 | 성씨 = 홍천 용씨 (洪川 龍氏) | 관향 = 강원도 홍천군 | 시조 = 용득의(龍得義) | 중시조 = | 집성촌 = | 인물 = 용희수, 용환각, 용태영, 용환승, 용진희, 용경빈, 용덕한, 용준형, 용재현, 용혜인, 용태연, [[용소연]동부지검 용성진 부장검사.대전지검 용태호 검사.용응규 변호사.용성호 변호사.용진호 시조시인 | 년도 = 2015 | 인구 = 14,483명 | 순위 = | 비고 = 홍천용씨 종친회 }}
홍천 용씨(洪川 龍氏)는 강원도 홍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용득의(龍得義)는 1208년(고려 희종 4)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내고, 1241년(고려 고종 28)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고 한다.
홍천(洪川)은 강원도 홍천군의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이다. 757년(경덕왕 16)에 신라에서 녹효현(綠驍縣)로 고치고 삭주도독부(朔州都督府)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1018년(태조 23) 고려에서 홍천이라 개칭하였고, 조선시대에도 홍천현으로 계속 이어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천의 토성(土姓)으로 피(皮)·변(邊)·용(龍) 3성이 기록되어 있다.[2] 1896년 강원도 홍천군이 되었다.
홍천 용씨(洪川 龍氏)에 대(對)하여
1. 홍천 용씨(洪川 龍氏) 시조(始祖) : 용득의(龍得義)
2. 홍천 용씨(洪川 龍氏) 유래(由來) :
홍천 용씨(洪川 龍氏) 시조(始祖) 용득의(龍得義)는 1208년(高麗 熙宗4)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내고 1241년 고려(高麗) 원종(元宗)12년에 통어사(統禦使)를 지냈으며 만년(晩年)에 강원도(江原道) 홍천군(洪川郡) 북방면(北方面) 노일리(魯日里)에 용수사(龍遂寺)를 창건(創建)하고 학서루(鶴棲樓)를 지어 여기에서 살았다. 후손(後孫)들이 홍천(洪川)에 대(代)를 이어 살았으므로 본관(本貫)을 홍천(洪川)으로 하였다.
3. 홍천 용씨(洪川 龍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본관소재지 : 강원도(江原道) 홍천(洪川)
홍천(洪川)은 강원도(江原道) 홍천군(洪川郡) 일대(一帶)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벌력천현(伐力川縣)이라 불리었으며, 신라(新羅) 때에는 세력(勢力) 확장(擴張)으로 벌력천정(伐力川亭)을 설치(設置)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녹효현(綠驍縣)로 고치고 삭주도독부(朔州都督府: 春川)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홍천(洪川)이라 개칭(改稱)하였고, 1018년(현종 9)에 춘주(春州 : 春川)로 병합(倂合)되었다가 1143년(인종 21)에는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獨立)하였다. 화산현(花山縣)으로도 불리었다.
1413년(태종 13)에 홍천현(洪川縣)으로 조선시대(朝鮮時代) 동안 계속 이어왔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춘천부(春川府) 홍천군(洪川郡)이 되었으며,
1896년 강원도(江原道) 홍천군(洪川郡)이 되었다.
1917년 금물산면(今物山面)을 남면(南面), 군내면(郡內面)을 홍천면(洪川面), 영귀미면(永歸美面)을 동면(東面), 감물악면(甘物岳面)을 서면(西面)으로 통폐합(統廢合)하였다.
1945년 인제군(麒麟面) 기린면(麒麟面)의 일부(一部)와 인제면의 일부(一部)를 통합(統合)해 신남면(新南面)으로 개편(改編)하고 인제군(麟蹄郡) 내면(內面)도 편입(編入)시켰다.
1954년 기린면(麒麟面)과 남면(南面) 등(等)은 인제군(麟蹄郡)에 환원(還元)시켰고 1963년 홍천면(洪川面)은 읍(邑)으로 승격(昇格)되었다.
4. 홍천 용씨(洪川 龍氏) 가문(家門)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
가문(家門)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득의(得義)의 6세손 희수(希壽)가 이태조(李太祖) 잠저시(潛邸時)에 오랫동안 시종(侍從)한 공(功)으로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고 공조(工曹)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歷任)하였으며, 그의 아들 천기(天奇)역시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정종(定宗)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歷任)하여 부자(父子) 함께 판서(判書)를 지내 가문(家門)을 빛냈다. 또한 진충호종공신(盡忠扈從功臣)에 책록된 운(雲) 등이 있다.
목사(牧使)인 9대손(代孫) 용득실(龍得實), 공조판서(工曹判書) 용서연(龍瑞衍), 좌윤(佐尹) 용운(龍雲), 돈령부동지사 용우구(龍友龜) 등(等)도 뛰어난 인물(人物)이다.
5. 홍천 용씨(洪川 龍氏) 과거급제자(科擧及第者) 조선시대(朝鮮時代)
용득택(龍得澤) (1598 무술생(戊戌生)) : 무과(武科) 인조(仁祖)15년(1637) 별시(別試) 병과(丙科)용일희(龍一羲) (1874 갑술생(甲戌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高宗)31년(1894) 식년시(式年試) 삼등(三等)용홍필(龍弘弼) (1874 갑술생(甲戌生)) : 籌學(籌學) 中宗(中宗)17년(1522)등(等) 모두 3名의 과거(科擧) 금제자(及第者)가 있다.(무과 1명, 사마시 1명, 주학 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