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태자와 관계된 홍천의 지왕동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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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태자와 관계된 홍천의 지왕동의 유래

관리자 0 1,304 2020.03.31 12:59

마의태자는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인물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에 항복하자 왕자는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생을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태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삼베옷으로 나물을 뜯어가며 세상을 마쳤다."고 되어있다. 이 두 기록 때문에 지금껏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가 허무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제 상남면에서 마의태자 유적 발견

그런데 최근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에서 마의태자 유적이 발견되었다. 상남면 넓은 들판에는 두 개의 돌이 포개져있는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겨놓았다는 바위가 있다. 주민들은 마의태자가 숨겨놓은 옥새를 지키기 위해 늘 뱀이 바위주변을 맴돌았다고 전한다. 또 옥새바위에서 남면의 김부리라는 마을로 넘어가는 수구네미라는 고개는 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어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김부리에도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남아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김부리의 대왕각 안에 모셔진 위패의 주인공은 경순대왕의 태자 김일, 바로 마의태자로서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1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낸다. 마의태자가 바로 그 마을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을에는 마의태자의 활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맹장군의 전설이 있다. 맹장군은 마의태자와 관련이 깊은 인물로서 마의태자를 수행해 이곳에 와 신라재건을 위해 의병을 모으고 양구와 한계리까지 군사활동을 하고 군량미를 모았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맹장군에 대한 전설로 미뤄볼 때 마의태자가 신라 재건을 꿈꾸며 항거 운동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인제군 군량리라는 지명은 신라부흥운동을 하기 위해 군량미를 모아두었던 곳이라고 전해지며, 인제에 유난히 많이 보이는 다무리(아랫다무리, 새다무리, 웃다무리/ 다물교) 라는 지명은 국권회복을 의미한다. 마의태자의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가 다무리라는 지명을 낳았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마의태자는 힘없이 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신라부흥운동을 한 것이다. 인제 지역에 유난히 항거에 관련된 지명이 많고, 매년 두 차례씩 마의태자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는 건 범상치 않은 일이다.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관동의 인제현에 신라 경순왕이 살던 지역이 있어 이곳을 김부대왕동이라 명명하였다. 그 읍지에 많은 사적이 실려있는데 경순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이다."라고 되어 있다. 김부리라는 마을이름은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전설의 주인공은 경순왕이라고 마을사람들은 믿어왔다. 김부리에 있는 대왕각 신위를 보면 전설의 주인공은 마의태자이지만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은 경순왕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경순왕은 인제에 올 수 없었다.

경순왕 시기의 신라는 경상도지역에 한정돼 있어서 경순왕이 인제지역까지 올라갈 가능성은 없다. <삼국사기>에는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갔다."고 했다. 경순왕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향한 것이다. <고려사>에 보면 개성에 도착한 경순왕에게 태조 왕건은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태자보다 높은 자리인 정승으로 봉하고 대궐동쪽에 신란궁을 마련, 개성에 정착해 살도록 하였다.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했다.

사심관제도는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고자 지방출신의 고급관리들을 우대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중앙과 지방의 조화를 위하는 취지에서 만든 사심관 제도는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심관은 중앙에 와 있는 사람으로 출신 지역을 관장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지방에 내려가 상주하는 제도는 아니다. 오히려 경순왕을 사심관으로 임명한 까닭도 서울(개경)에 머물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경순왕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도 개성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경순왕릉이 경기도 연천(개성에서 불과 60리)에 있어(조선조 영조때 발견됨) 신라의 왕들 중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묻혔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 경순왕의 무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의 귀족들은 대부분 개성을 중심으로 살다가 죽은 다음에도 개성 주변에 묻혔다. 경순왕도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생활하다 연천에 묻힌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경주에서 개성까지 항복하러 가는 길에 인제에 들른 건 아닐까?

경주에서 한강 유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교통로가 있다. 죽령 통과하는 길, 계립령(문경, 충주)을 통과하는 길, 추풍령 길인데, 신라는 이 세 길을 모두 썼다. 중원경이 성립된 이후에는 계립령이 경주와 한강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서 경순왕도 계립령을 이용하여 개경까지 갔을 것이다. 당시 경순왕의 30리에 달하는 큰 행렬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제일 큰길인 계립령을 통과해야 한다. 경주에서 계립령을 지나 수로를 이용할 경우엔 양평을 지나고 육로를 이용할 경우엔 이천을 지나 개성으로 향한다. 경주에서 개성까지 경순왕의 행렬이 지나간 길에 인제는 없었다.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경순왕이 강원도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없다. 더욱이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의 김富와 경순왕의 김傅는 한자가 다르다.

그렇다면 인제지역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마의태자일까? 김부대왕동의 유래라고 할 수 있는 김부가 누구일까. 위치라든가 이름으로 봤을 때 김부대왕동과 대왕각은 분명 관련이 있을텐데, 대왕각의 신위는 마의태자이다.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鎰이라면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과는 전혀 다른 이름이다. 김부와 김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김富는 마의태자 김鎰의 또 다른 이름 인제 갑둔리 어귀의 5층 석탑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김부리라는 마을이름과 똑같은 한자의 김부라는 글자가 보였다. 지명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단서이다. 김부라는 사람을 위해 세워진 이 5층석탑은 고려초기에 해당하는 탑의 양식이다. 명문을 보면 태평16년인데, 요나라 연호로 1036년(고려정종 2년). 신라가 멸망하고 100여년이 흐른 뒤다. 따라서 탑에 새겨진 김부는 고려초기 이전에 존재했던 인물이다. 탑에 이름을 새기고 기릴 정도라면 제법 영향력이 있던 인물일 것이다.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는 김부라는 사람들은 인제 갑둔리 5층석탑에 새겨진 김부보다 후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고려사로는 김부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그런데 탑을 세운 시기와 마의태자가 살던 시기가 큰 차이가 없다. 마의태자, 김일과 석탑에 새겨진 이름 김부는 동일 인물이었다. 당시 표기법인 이두를 이용해 김부와 김일, 두 이름의 관계를 살펴보자. 향찰이나 어휘를 표기하는 방법상 鎰이 謚과 같고, 그 뜻을 보면 부와 같이 넉넉하다 많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鎰과 傅는 뜻으로 보면 같은 말이다. 같은 말을 표기를 달리한 것이다.

이두표기로는 謚과 傅는 넉넉하다는 같은 뜻을 가진 한자로 함께 쓰인다. 그런데 鎰과 謚은 같은 뜻이니 鎰과 傅도 같은 뜻이 되어 함께 쓸 수 있는 것이다. 김부는 바로 김일인 것이다. 갑둔리 5층석탑에 새겨져 있는 김부라는 이름은 마의태자 김일의 또 다른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마의태자와 인제는 분명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인제는 금강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신라시대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갈 때 가장 손쉽고 빠른 길은 동해안을 따라 죽 올라가는 길이다. 그런데 마의태자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개골산루트의 미스터리

마의태자가 경주에서 금강산까지 가는 길목 곳곳엔 마의태자의 유적과 전설이 남아있어 그 행적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 충주다. 월악산자락에 자리한 미륵사 대원사지는 마의태자가 세웠고, 미륵사 대원사지와 마주보는 덕주사는 마의태자의 동생인 덕주공주가 창건했다. 사찰 입구엔 덕주공주가 조성했다는 마애불이 전해지고 있다. 충주에 이어 원주 그리고 양평에도 마의태자의 전설이 남아있다.

양평의 유명사찰인 용문사에는 수 백년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의 유래에 마의태자의 전설이 있다. 인제로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홍천에도 마의태자의 전설이 남아있다. 지왕동(至王洞)이라는 지명은 왕이 지나갔다는 뜻이다. 거기서 조금 올라가면 큰절이 있고 절터에는 암자가 있다. 거기서 서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왕터라는 곳이 있는데 왕이 넘어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지왕동과 왕터는 바로 홍천에서 인제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마의태자의 전설로 중요한 곳은 계립령과 양평 한계사지이다. 결국 마의태자가 동해안 교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경주에서 계립령까지 온 뒤에 충주를 거쳐서 수로로 양평지역에 이른 뒤 홍천과 인제 한계령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마의태자가 간 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충주와 원주는 통일신라시대 각각 중원경과 북원경으로 불리던 신라 제2의 수도였다. 그리고 마의태자가 지나간 곳은 모두 천혜의 요새들이다. 충주에 있는 미륵사 대원사지와 덕주사도 덕주산성 안에 둘러쌓여 있어 외부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이다. 마의태자가 천혜의 요새들만 선택해서 간 이유는 신라의 중요 거점 지역을 거치면서 사람을 규합하면서 갔을 가능성이 크다. 경주에서 인제까지-마의태자가 선택했던 길엔 신라부흥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인제에 남아있는 전설과도 같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부(경순왕)가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태자가 이에 반발하며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오직 충신과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인데, 어찌 일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인가 라고 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통곡하며 물러섰다"고 한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뜻에 강력하게 반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태자가 아무런 저항 없이 금강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을까? 더욱이 당시 신라엔 경순왕의 항복에 대해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당대 유학자인 최치원도 해인사에 들어가 평생 은둔생활을 했으며, <고려사절요>에 보면 신라가 패망하고 200년이 흐른 뒤에도 신라부흥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자 최충헌은 "신라부흥에 대한 이야기를 각지에 퍼뜨리니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끈질기게 신라 부흥운동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인제에 남아 있는 전설대로 마의태자는 신라부흥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인제는 군사적인 요충지로 외부세력에 대항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계령 고개에 있는 한계산성은 뒤로는 높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어 방어하기에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산성으로서 축성기법을 통해 연대를 추정한 결과 삼국시대부터 존재해왔다. 따라서 마의태자가 인제지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초에도 산성은 이 자리에 있었다. 산성 꼭대기에는 천제단이 있는데 적이 들어올 때마다 안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삼국시대이래 한계산성과 백담사의 전신인 한계사지는 방어기지였다. 한계사지는 전통적인 절 기능뿐만 아니라 국방의 기능, 산성의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또한 인제는 산간오지면서도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저항세력이 정착하여 살기 쉬운 곳이다. 김부리 일대에서는 고려시대 최고급 청자접시와 서민용의 그릇과 단지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마의태자는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친 신라적이고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인제에 정착하여 준비하였으나 신라는 마의태자의 운명과 함께 멸망하고 만다.

금(金)나라로 이어지는 신라부흥의 꿈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기록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 이전 여진 부족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고 적혀 있다. 즉 금의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이다. 신라 부흥의 꿈은 좌절된 것이 아니라 만주대륙으로 이어졌다는 얘기이다. <금사(金史)>에는 "금의 시조의 이름은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미 60여세였다. 그때 완안부에 나이 60에 시집 안간 처녀가 있어 그 처녀와 결혼했다."고 적고 있다. 


13-06-1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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