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님 : 남궁진 박사의 아버지에...

홍천자료실

남궁 억 선생님 : 남궁진 박사의 아버지에...

관리자 0 1,214 2020.03.31 10:01

남궁 억 선생님 : 남궁진 박사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
나의 아버지(남궁염)는 1880년에 출생하셨고 중학교를 졸업하시던 해인 1906년 한국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투옥되시자 감옥 앞에서 단식투쟁을 시작했지만 할아버지께서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할 것을 간곡히 이르시자 한국을 떠나신 것이다. 그 당시 영어를 약간 구사하는 정도였지만 Randolph Macon대에 입학이 되어서 돈을 벌어가며 학업을 시작하셨고, 마침내 대학을 졸업한 후 은행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곳에 계시던 이승만 박사께서 둘이 함께 한인사회를 일구어 나갈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후에 나의 어머니가 되신 처녀에게 소개하시고 결혼하도록 주선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미국의 대경제공황의 역경을 견디어내며 동지회를 결성하여 뉴욕에 살던 한인들이 합심단결하여 2차대전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하는 한편, 한국과 계속해서 정치적인 관계를 유지시켜 나갔다고 한다.
해방 후 1948년에 아버지는 재미 최초의 영사관인 뉴욕 주재 영사관으로 임명받으셨다(두번째는 샌프란시스코 주재 영사관이었음). 그래서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 동안 영사관으로 봉직하셨다. 아버지는 종종 UN주재 한국대사를 대리하여 UN회의에 참석하여 일을 보기도 하셨다. 그 후 이승만 박사가 4·19혁명으로 하야하자, 아버지도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계속해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일하시다가 1960년 말에 퇴직하셨다. 이듬해인 1961년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성장기 동안 아버지는 계속해서 할아버지께 우리 가족의 소식을 알려드렸으나 한국으로부터 소식 듣기는 매우 어려웠다.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에게 우리 민족이 어떻게 일본 치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지와 독립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여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는 당시 한국과 일본에 영향을 주는 강대국들의 역사의 움직임에 대하여 잘 파악하고 계셨던 것 같다. 또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당신의 혁명과 개혁사상 때문에 여러 차례 투옥되셨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또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당시 한국 정부는 단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셨다. 또 우리에게 무궁화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는데 특히 무궁화가 독립운동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무궁화는 물론 여러 가지 화초와 나무 가꾸기를 즐겨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후손들이 와서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게 자두나무 아래 묻어주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객지 생활의 어려움과 또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당신의 목표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불굴의 의지를 배우셨다.
아버지는 집안에서는 엄한 유교적인 모습을 보이셨지만 할머니에 대한 효성은 아무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매우 극진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인 아버지를 데리고 산책도 하시고 자주 옆에 가까이 앉히시곤 하셨다는데 당시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 때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이 없으시나 따뜻하신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 장성하여 학교에 다니던 때부터 할아버지께서는 대부분 집을 떠나 생활하셨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물론 할머니와 함께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관여하시던 정치적인 주요 쟁점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외아들이신데 자식도 외아들이므로 가족 중에서도 아버지를 더 각별히 생각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1906년에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아버지의 두 여동생(또는 누님?)들은 한국에 남아서 각각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1939년에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한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귀국하여 장례를 지내고 할아버지께서 평소 활동하시던 모곡으로 모셨다. 당시도 한국은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라와 동포를 돕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셨다고 한다. 1949년에 다시 한번 귀국하셨으며 그때 역시 두 여동생들과 반가운 만남을 가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곁에 가까이 있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셨다. 그러나 자신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자신의 생의 목적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의 생의 목표를 실현하는 일도 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충실하게 봉직하신 것이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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