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님 :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지...

홍천자료실

남궁 억 선생님 :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지...

관리자 0 1,149 2020.03.31 09:59

남궁 억 선생님 :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지도자
독립협회는 서재필 박사가 배재학당의 협성회라는 학생회원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토론회가 서대문 무악재 밑에 있는 모화관으로 옮겨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독립협회 간판을 걸게 된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러나 이미 일반 민중을 상대해서 독립정신을 기르고 구습을 타파하여 민족의 자주와 번영을 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일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의 아관파천 등은 이러한 국권회복을 위한 대중의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목표는 국권회복이며, 이를 위하여 외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외국 사신의 숙소인 모화관을 헐고 독립관을 지어(1897. 11. 20 기공) 연일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독립신문>과 <협회보>를 통해 이를 널리 알리고 그 힘을 모아 나갔다.
자주개혁 정신과 민권신장 및 민중의 자각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외국의 교묘한 이권다툼과 이에 앞장선 매국적 관료들을 고발하고 막아내는 데 힘을 다했다.
일인의 명성황후 시해와 이를 빌미로 한 고종의 아관파천을 통해 민중의 정치 참여를 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로 인해 이상재 남궁억 등 17명의 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어 학춤 등의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고문 중에는 '학춤'이라는 것이 제일 혹독한 것인데 천하의 장사라 하여도 고통이 심하여 혀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같이 무서운 고문을 받으면서도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견디었는데, 이는 어머니께서 사식을 넣으면서 전한 쪽지에 "억아, 절대로 항복하지 마라" 한 것을 생각하며 이겨낸 것이라고 한다.
독립협회의 시작에는 서재필이 있었고 협회의 회장은 윤치호가 맡았다. 그러나 협회의 살림과 사업을 주장하고 이끌어간 사람은 남궁억이었다. 이를 위하여 실리와 명분은 남에게 양보하여 화합을 이루는 데 힘썼으나 특히 국사를 논함에 있어서 선생은 추호도 피하고 굽힘이 없었다. 이런 선생을 두고 사람들은 남궁 고집, 혹은 남궁 반대라 하며 못이기는 척 선생을 따르고 지지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부패한 관리 이용익과 아관파천의 주범 이범진에 대한 성토와 중추원에 민중의 참정권을 확대하도록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민중참정권확대상소운동" 등이다.

그대로 묵과할 것인가
"이용익이 북청 남병사(병마를 지휘하는 무관)로 있을 때 남의 조상 무덤과 논, 밭을 마음대로 베어 헤치며 가로채 민란이 일어나고, 반항한다 하여 사람의 가죽을 벗기며 뼈를 긁어서 양민을 살해하니 천인이 분히 여겼거늘 이러한 중죄로 귀향을 보냈건만 오히려 뇌물로 권력을 사고 농상공부의 감독직을 가지고 '하늘이 치더라도 무섭지 않다' 하며 더욱 그 도가 더하니 정부는 이 일을 다스려 변상케 하고 중형에 처해야 마땅하거늘 이래도 그대로 묵과할 것인가?"
-- 독립신문 광무 2년(1898) 8월 2일 기사 일부 --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v 


13-06-1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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