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과목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
선생의 유해는 정부의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으로 평소 새벽기도를 드리시던 유리봉(수정봉/유리처럼 단단한 바위봉) 중턱에 그 묘역을 조성하고 원래 모셨던 종증산과 교회터에서 옮겨 모셨다. 그 아래로 선생의 얼을 기리기 위해 제자 김우종 목사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세운 한서초등학교가 있고 250호의 작지않은 마을이 속속들이 펼쳐져 있다.
일제의 침략이 심해질수록 선생의 기도 생활도 그 횟수가 잦아지고 간절해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비장한 마음이 들게 마련이었다. 선생의 기도처는 교회와 함께 온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 유리봉 정상이었다.
전 생애 중 22년이라고 하는 적지않은 시간을 모곡에서 지내신 선생은 무궁화 사건으로 구속되시기 전까지 1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 산 정상에 오르셔서 새벽기도를 드리셨으니 높이는 불과 1백여 미터 조금 넘는 작은 산이지만, 이 산이야말로 일제하 이 민족의 진정한 얼과 혼이 서린 각별한 곳이다.
이 산 정상에 선생의 기도처를 기념하여 세운 제자들의 작은 비문에 양양군수 시절 신임군수환영회 석상에서 즉석으로 읊은 "독립의 노래, 설악산 돌을 날라 ……"와 함께 선생의 마지막 유언인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선생의 이 유언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태 전 부인의 상을 맞아 장례를 치를 때 선생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치 행려병자를 모시듯 상여를 쓰지 않고 관으로 옮겨 공동묘지로 모셨다. 선생의 위치에서 부인의 묘를 쓸 곳이 없어서 이렇게 공동묘지로 모신 것이 아니다.
이곳 모곡리가 선생의 선영이니 얼마든지 좋은 곳으로 모실 수 있었고 후일 자신의 묘를 생각해서라도 남보다 더 크고 웅장한 묘를 쓸 수도 있었다. 아니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라잃은 백성의 독립을 향한 일편단심"은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이었으니 차마 부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라도 묻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친척과 친지들은 선생의 묘소를 종증산 거므레에 모셨다가 다시 교회터로 모신 것을 국가에서 이곳 유리봉 중턱으로 옮겨 선생의 삶과 뜻을 기리는 묘역을 조성한 것이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