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십전짜리 밀짚모자

홍천자료실

남궁 억 선생 : 십전짜리 밀짚모자

관리자 0 1,216 2020.03.31 10:53

남궁 억 선생 : 십전짜리 밀짚모자

20세기 새로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일제의 강점을 당하게 된 이 땅에는 일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각종 생활용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동차와 신발 화려한 색깔의 옷감은 물론 시계와 라디오 같은 다양한 용품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생활용품들이 가지는 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실용적이고 편리하고 멋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땅의 개화 지상주의는 이러한 '외제 선호사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새로운 변화와 도약을 추구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별다른 이견없이 이를 수용하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중절모를 쓰고 양복에 넥타이를 맨 신사의 손에는 반드시 반지르한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이 땅의 역사와 함께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겨 지킬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와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는 지혜와 지조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점에서 선생은 참으로 위대한 겨레의 스승이셨다.
이곳 모곡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 중에 "인도의 간디는 혁명의 일환으로 물레를 돌렸지만 선생은 삶 그 자체가 본이 되는 삶을 사셨다"는 말이 있다.
삶 그 자체가 우리 것을 소중히 여겨 이를 개발하고 가꾸어 가는 차원에서 모범을 보이시고 경제 이전에 먼저 정신을 바로 세우고 정치 질서와 문화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개화파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본에 망명중이었던 그들과 내통하여 거사를 계획했다는 모함을 받아 구금을 당하여 견디기 힘든 고문까지 받았던 선생이셨지만 선생은 결코 개화 지상주의가 되지 않으셨다.
선생은 선생의 생애에서 특히 일제의 강점 아래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들을 거부하셨다. 선생의 생애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외제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감옥에 들어가셔서도 일인이 만든 수의를 거부하고 따님이 한복을 넣어 드릴 때까지 알몸으로 지내셨다고 한다.
일년 사시절을 십전짜리 밀집모자를 쓰고 다니셨고 겨울에는 무명옷, 봄·가을에는 광목옷, 여름에는 베옷을 입으며 양복을 안 입으셨고, 신은 짚신을 삼아 신거나 미투리를 신고 먼 여행에는 고무신을 신었다. 밀짚모자가 찢어지면 실로 기워서 쓰고, 옷에 물감을 들일 때는 산에 가서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물들여 입고, 결단하고 일산(日産)은 손을 대지 않았으니 심지어는 왜놈들이 경영하는 버스나 택시도 타지 않고 환갑이 넘은 노인이 꼭 걸어서 여행을 했다. 선생은 모든 생활 필수품을 자력으로 해결했다. 좋은 모자와 좋은 옷을 입을 형세가 못되어서가 아니요, 검소한 생활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외제선호사상이 가져올 민족의 파탄과 우리 것 속에 깊이 배어 있는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지켜 독립의 사상을 기르고자 하셨던 것이다.
은나라 사람 백이와 숙제가 은나라를 침해한 주나라의 곡식을 안 먹겠다고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주려 죽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선생은 한발 더 나아가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독립의 사상과 얼을 가꾸기 위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지키고 가꾸며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하루는 제자 한 분이 선생의 다 헤어지고 시커멓게 더러워진 밀짚모자를 안쓰럽게 생각해서 새 모자를 사가지고 와 선생께 드렸다. 제자의 선물을 받아드신 선생은 모자야 햇볕을 가리면 그만이지 조금 헤어지고 검어진들 무슨 흠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돌려 보내셨다고 한다.
십전짜리 밀짚모자를 깁고 또 기워가며 십년을 넘게 쓰시면서 보다 편리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이 있어 이를 권하면 "우리 손으로 만들면 그때나 ……" 하셨던 선생의 생애는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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