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조선이야기 에 실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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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 억 선생 : 조선이야기 에 실린 3·1...

관리자 0 1,238 2020.03.31 10:42

남궁 억 선생 :  조선이야기 에 실린 3·1만세운동

단군기원 4252년 기미 3월 1일
단군조선 4252년 3월 1일 조선에 미증유의 대만세운동이 일어나 조선의 독립기초가 우뚝 섰으며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했다.
이날은 그 전 해 11월 20일에 붕서(崩逝)하신 고한황(古韓皇)폐하의 국장 2일 전이어서 경성시가는 영결식에 참석키 위해 경향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붐볐다.
온 나라가 애통함에 잠겨 있던 이날 아침에 시가 벽에는 고황제폐하께서 이욕(利慾)에 매수된 역적에 의해 시해됐다는 통고문이 나붙어 우리를 분노케 했다.
이날 아침부터 기독교남학교를 수색하는 등 무언가 약간의 기미를 눈치챈 경찰이 종로청년회관을 수색하고 있던 하오 1시쯤 회관 부근의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를 불렀고, 그 여파는 거리로 퍼져 순식간에 종로부터 성 남문, 서문의 전 대로상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수십만의 군중으로 가득했다.
경성 안팎에서 만세가 한창일 때 그 선언서에 날인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일본대관 1인도 참석한 자리에서 정식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나서 소관 경찰서에 알렸다. 곧 경관에게 체포되어 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만났는데, 요절할 일은 함께 차를 타고 있던 일본경관도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손을 들고 부른 것이다.
33인을 태운 차가 지나가고 난 뒤 시위대는 셋으로 나뉘어 일부는 고한황폐하의 빈소가 있는 덕수궁으로 향하고, 일부는 정동 미국영사관쪽으로 향했으며 일부는 총독부로 향했는데 조선은행 앞까지 갔다가 일본병사와 순사·관민에게 막혀 멈추었다.
시간이 흐르자 일본병사와 순사가 전시가지에 퍼져 행인이나 학생이나를 막론하고 손에 닿는 대로 체포해 학대함이 아주 심했지만 한인측에서의 반항은 일체 없었다.
포박된 학생 중 관립학교의 한 생도가 경찰에 체포돼 감금된 뒤의 정형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관립학교 학생의 진술
"나는 총독부로 향하는 제3대열에 참가하여 이현까지 갔다가 일본순사 2인에게 잡혔는데 그들은 차고 있던 칼집으로 나를 때렸고, 그 관민들은 더욱 가혹해서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는데 노상에서 잠시도 쉬지 않았고, 심한 자는 나막신을 벗어 맹타하였다. 경무국에 압송당해서는 4일간을 감금해 놓고, 매일 먹은 밥은 한 그릇의 밥과 수저 하나였는데, 가끔 간수란 자가 성내며 꾸짖길 '너희들 개의 무리에게 수저가 어찌 가당키나 하겠는가' 하고 주던 수저까지 빼앗아 가면서 우리에게는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3월 5일에야 어떤 경관 앞에 끌려나왔는데 힐문하길 '이번 운동에 누가 배후에 있으며, 그 교사자 중에 네가 평소에 친했던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하거늘 나는 모른다고 답하자 내 뺨을 여러 번 세게 때리고 다시 물어 기필코 다른 사람을 고발할 것을 기다렸다. 내가 끝내 모른다고 고집하자 그 경관은 내 두 손을 단단하게 결박하고 번번이 뺨을 치고 굵은 철사로 옆구리를 찌르는 등 악형을 가하다가 한결같이 모른다고 하자 내 두 손으로 의자를 머리 위로 높이 들게 하였다. 힘이 다해 내려오면 때리고 차고 하여 누구든지 고발하게 했지만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날 6일에 재판소 검사에게 보냈다. 처음부터 몇 가지 의례적인 질문을 꺼내 마친 후 '일본정치에 만족한 생각이 있느냐'고 묻기에 '대단히 불만족하다'고 대답하자 그 저녁에 나를 감옥에 가두었다."

평양성 내 두 교회당의 만세운동
이번 3월 1일의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은 경성뿐 아니라 전 조선 도시마다 대략 비슷한 양상의 운동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천도교 양 교파의 활약이 컸다.
대체로 평양은 전 조선기독교회 중 모범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날 하오 1시에 평양성 내의 양 교회당에서는 고한황폐하의 기념식이 거행되었는데 순찰하던 일본형사가 학생복장 속에서 구한국 태극기를 보고 신고해 경관과 헌병들이 달려와 보니 군중은 이미 예배를 마치고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순경과 헌병들이 어찌하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 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위행렬을 이루고 와서 합했다.
저녁 무렵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데 소방대를 동원하여 물을 뿌리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멸시적이고 도전적이라고 하여 돌 하나를 던졌더니 즉시 경찰서에서는 총을 쏴 사상자가 낭자하였다.
다른 도시에서도 대개 비슷한 양상의 운동으로 구타·감금·살육을 낸 곳이 많았다.

3월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고수하려 했고, 다음날은 국장일이라 내정했던 운동은 4일로 변경되었다.
장례식에 있어서도 한·일 양측의 의견이 충돌해 서로 자국식을 고집했는데 최종적으로 일본조정에서 궁문부터 동대문까지는 일본식으로 하고, 동대문부터 능지(陵地)까지는 한식으로 하라고 정했다.
또 장례차 앞의 명정도 한인은 '대한국황제'로 쓸 것을 주장했지만 일인은 굳이 '조선이태왕'이라는 봉작을 사용해 한인들의 분노를 샀다.
3월 5일에 또 큰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일본헌병들이 성난 눈초리로 결코 용서치 않겠다는 기세를 보였다. 한 미국인이 이날 목격한 참상을 잡지에 실었는데 그 대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인 잡지에 참상을 게재
"시계가 상오 9점을 알리자 대로상 정거장 부근에 있는 각 상점과 집으로부터 청년의 무리가 벌떼처럼 옹호하며 나와 정거장에 운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벼락치듯 제창하더니 조금 있다 한 사람이 인력거를 타고 남대문 연도로 나아가자 대중이 옹호하여 남대문으로 갔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서대문으로 들어가 황궁으로 향했다. 그 단체는 모두 학생들로 조직되었고, 고등여학교 생도들도 참가하였다.
궁문 앞 광장에 이르자 일본순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칼로 마구 베 도처에 사상자가 널렸고, 체포된 사람도 수백인이었지만 학생측의 반항은 하나도 없었다.
이번 운동에는 세브란스병원의 간호생들이 전부 참가했는데 손에는 붕대를 휴대하여 부상당한 사람들을 구호하였다.
대체로 한인을 학대하는 데 있어 일본 문관과 역부(일꾼)들이 가장 심했다. 그들은 소녀들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가 도랑에 처박기도 하고, 또 발로 차고 때리고 하기를 순사가 인수하러 도착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들 중 한 여자가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방면된 후 겪은 것을 구술하였다."

한 여자가 곤고(困苦)를 구술(口述)
"우리 체포됐던 여자 일동이 경찰서 문안으로 끌려들어갔는데 20여 명의 순사가 줄지어서서 때리고 차고 또 칼집으로 휘둘러치는 것이 아주 난폭해 한바탕 상황이 지난 후 우리를 어떤 방에 끌어넣자 우리는 곧 정신을 잃었소. 몇 시간이 지났는지 정신이 돌아와 좌우를 둘러보니 남녀청년 무리가 방안에 가득합디다.
조금 있다 한 경관이 우리를 일일이 호출하여 힐문하는데 양다리를 결박한 채로 꿇어 앉게 하고 매 일문일답에 한번씩 때리는 것은 의례적인 일이요 가끔 얼굴에 침을 뱉었으며, 추악한 욕설은 형언키 어려울 지경이었고, 그런 가운데 내 흉금을 피력하라고 명령하여 응하지 않았더니 달려들어 웃옷을 손으로 찢고 또 양손가락을 함께 묶어 갑자기 세게 밀어 어찌나 아프던지 손가락이 손에서 뽑혀나가는 것 같아 나는 곧 눈을 감고 방바닥에 쓰러져 엎드렸더니 그 경관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내 옷을 붙잡고 또 한번 세게 때린 후 머리채와 귀끝을 잡아끌고 휘어잡고 하더니 이 또한 뜻에 홉족치 않았는지 두 손으로 무거운 의자를 높이 들게 하였소.
힘이 다해 떨어뜨리자 팔꿈치 뒤를 몽둥이로 때리고 또 다른 악형으로 한 시간여를 괴롭혀 기력이 다하자 즉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라 하거늘 나는 능히 일어서지 못해 기어 1층 계단을 내려가다 수족의 힘이 다해 전 계단을 한번 굴러내림과 동시에 정신이 혼절되었소. 곧 정신이 들어 다시 감금실로 쫓겨들어가는데 기어서 갔더니 지키던 일본순사들이 이 모양을 보고 크게 웃으며 그치지 않아 나는 곧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기도하였더니 비몽사몽간에 우리 주 야소께서 나타나시어 많은 평안과 위로를 받았소. 이와 같이 5일을 고통을 당하고 서대문밖 감옥으로 보내었소. 감옥에 들어가던 초에 나의 전신을 발가벗게 하고 여러 일본 남자가 둘러서서 쳐다보며 조소하더니 잠시 후 한 죄수들 틈으로 보내는데 앉거나 누우면 어깨와 등이 서로 닿았고, 먹는 것은 누런 콩과 소금뿐이었소. 어떤 사람이 가끔 와서 보고 여러 가지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는데 개라느니 돼지라느니 기타 짐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것 외에도 많은 학대는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워 생략한다.

운동의 성질이 바뀜
3월 1일과 5일의 만세운동은 대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후 정부는 경성과 그 부근 요충지에 병사를 배치하여 주야로 순찰하고 대포를 앞세우고 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했고, 또 3∼4인 이상만 모이면 즉시 병력으로 해산하였다.
그 사이 운동을 실제로 한 사람과 혐의자를 매일 포박하는데 어떤 신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국 내 그 수가 6천 명이라고 하였다.
이후로 운동의 성질이 변하여 숨바꼭질 형태를 활용하여 정부를 속이고 우롱하였다.

청년 구락서(具樂瑞)의 처참한 죽음
이번 운동에 대처하는 정부의 압제는 너무나 가혹하고 주밀하여 낮에는 다닐 수 없어 종종 야간을 이용했는데 3월 27일 하오 9시경 한무리의 청년들이 경성 안동에 모여 3분간 독립만세를 부르다 순사·헌병에게 해산당했다. 그 중 한 청년 구락서가 집에 돌아가는데 별안간 한 사람이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그는 곧 모인 사람들 가운데 표시를 했던 일본순사였다. 그를 밀어 넘어뜨림과 동시에 칼을 빼 마구 찔러 마치 나무꾼이 큰 참나무를 도끼로 찍어 놓은 것 같았다. 즉시 혼절하여 사체가 되어 버렸는데 어떤 한인이 달려와 구하고 보니 20여 군데의 상처가 있는데, 두골은 깨져 뇌수가 나왔고, 좌우 손은 다 무참히 상처를 입었으며 왼쪽 겨드랑이는 찍혀 골간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를 죽인 일인순사는 도망하고 그는 잠깐 사이에 극도의 고통 속에서 절명하였다. 그 부근에 덕수궁병원이 있어 들것에 옮겨 치료를 했지만 별 효과가 없어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운반하는 도중에 어떤 일본순사가 가로막고서 "외국인병원으로 옮겨 치료하면 너희에게 후환이 있을 것이다. 지금 곧 일본병원으로 옮겨가야 그 사람이 혹 회생할 것이다" 하니, 대개 그 의중은 이같은 참상이 외국인이 보는데 탄로날까 싶어서였던 것이다. 세브란스에 도착했을 때는 절명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 병원에서 사체를 검사한즉 분명한 상처는 열 곳뿐인데 그대로 촬영하고 의복은 유혈로 전부 붉게 물들었고 머리와 손가락은 조각조각 끊어져 사람의 심성을 가진 사람이면 참으로 차마 보고 잊지 못할 흉측하고 처참한 것이었다.
<독립신문>의 창간
대한독립을 선언하던 날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는데 주필은 보성전문학교장 윤익선이었다. 윤 주필은 신문을 창간하던 날 즉시 체포되었는데 신문은 계속 간행되었다. 일본순사가 보성학교의 인쇄기구를 일일이 압수했지만 신문은 여전히 매일 아침 출간돼 그 주필이 누군지, 어떤 방법으로 간행하여 퍼뜨리는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 신문이 보도한 것을 대략 간추려 보면,

"인왕산 밖에 독립문이 우뚝 서 있는데 그 중요한 돌에 조각하여 청홍으로 채색한 것은 대한국기이다. 근년 이래로 위층으로 끌어올린 안쪽 문을 일인이 봉쇄하고 밖에 가시울타리를 하여 누구든지 그 문으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3월 5일 아침에 보니 국기가 여러 해 이래 변색해 있던 조각그림이 의외로 아주 검붉어 이와 같이 대담한 행위가 누구의 소행인지 여러 사람의 입이 한결같이 전하자 사방에서 보러온 자가 무려 수천이었다. 서로 의심하며 묻기를 이곳에 시렁이나 계단이 없는데 하룻밤에 이같이 이루기 어려운 일을 어떤 사람이 했겠는가. 정녕 신의 흔적일 것이다라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정부는 이번 이적이 군중의 감상을 불러일으키자 흔적을 없애기 위한 계책에 부심하여 연구한 결과 한편으로 모인 사람을 해산하고 또 한편으로 소방대의 분수관을 가지고 와 그 조각의 붉은색을 지우려고 했지만 결과는 도리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검붉은색이 변하여 선홍이 되자 기이하다고 외치는 군중의 입은 관의 힘으로도 막지 못했다."

이 일은 더욱 한인이 일인과 함께 살지 못할 이유를 느끼게 한 것으로 경성 내 전차수와 연초 일꾼들이 일제히 동맹파업하였고, 상점주들도 성 안팎에서 일제히 폐점·파업하였다.

일본군대가 외국인을 혐오
대체로 이번 3·1운동의 주동혐의를 외국 선교사에게 돌렸는데 특히 일본군대는 이것을 오로지 조선인과 외국인 기독교 신자가 범한 것이라고 하여 혐오가 극도에 달했다.
3월 12일 발간된 <인천조선신문>(경찰과 헌병 당국의 기관지) 기사에서는 조선인을 선동한 것은 미국 선교사로 그 선교사들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종교 이면에 숨겨가지고 조선인을 고무시키고, 외국의 자유정신을 고취시켰다고 보도하였다.
대개 사람의 지식이 발전하는 것은 물결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기 물건을 소중히 하는 것도 자연적인 성질인데 어찌 남의 지도를 기다린 후에야 일어나겠는가. 이것은 사리가 확실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악성이 있는 곳에 이런 이치 밖의 일을 감행하는 자가 간혹 있는데 바로 제암리와 서촌에서 일본병사가 한 짓이 바로 그러하다.

제암리에서 일병의 잔학상
제암리의 학살과 방화는 이미 동·서양 신문, 잡지에 간행돼 퍼져 많은 입에 오르내리지만 여기에 기록한 것은 그 촌락을 방화한 지 3일 후, 서울에 있던 어떤 영국인이 직접 가서 조사하고 탐색한 것을 대략 기록한 것이다.

"4월 17일 목요일. 어떤 외국인이 와서 전하기를 수원군 남쪽 50리 되는 제암리에 아주 처참하고 가혹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했다. 즉 많은 기독교신자를 한 교당 안에 가두어 놓고 문을 폐쇄한 뒤 일병이 그 교당 안을 향해 실탄을 쏴 모인 사람 모두 사망 아니면 중상이 확실한 후에 교당에 불을 질렀는데 이것은 전부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나는 곧 눈으로 보고 확실히 알기 위해 그 다음날 열차로 수원에 내려가 자전거로 제암리로 8∼9리쯤 가니 그곳에 경찰과 헌병의 주재소가 있었다. 추측컨대 저들은 소행을 숨기기 위해 필시 내가 가는데 방해를 할 것으로 생각하고 10∼20리 돌아가는 길로 해서 큰 준령을 넘어 그 마을에 들어갔다. 곧 당한 참화의 진상을 탐문했으나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모두 입을 다물고 숨기는데 전율·공포의 기색이 말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보였다. 다시 조금 가다가 한 무리의 문·무 관리를 만났는데 마침 참경을 조사중이어서 한두 명의 관리와 얘기한 뒤 허락을 얻어 마을 안을 돌아보고 또 촬영까지 했으나 진상의 보도는 털끝만큼도 조사하여 얻지 못했다. 잠시 후 관리들이 돌아갔는데 그 마지막 한 사람의 그림자와 목소리가 마을 밖으로 겨우 벗어나자 공포 가운데 쌓였던 촌민의 굳었던 혀가 비로소 풀려 그 흉악한 살인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4월 15일 하오경 몇십 명의 일병이 와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중 장년들은 다 야소교당으로 와서 모여 타이름을 들으라고 하여 우리 야소교인 22명이 모두 도착해 명령대로 줄지어 앉아 말할 것이 무엇인지 서로 의아해하는 사이에 일병들이 교당을 빙 둘러싸고 창문으로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니 맞은 사람은 죽지 않으면 다쳤다. 그러나 저 도깨비와 한 가지인 일병들은 교당에 불을 질러 순식간에 화염이 조요(照耀)했고 틈을 타 도망쳐나온 사람은 총으로 즉살하여 지금 교당 밖에 6구의 사체가 엎어져 있습니다. 그 중 두 여자는 명령에 의해 교당에 가다가 별안간 총성을 듣고 크게 놀라 각각 남편을 구하려고 황급히 달려가다 당장에 참살되었고 한 사람은 19세이고 한 사람은 40세인 여인으로 모두 기독교인이오 일본병사는 방화한 후 퇴거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마을의 현재 상태를 말하면 30채의 민가와 교당은 전부 타버리고 8호만 겨우 남았는데 눈에 보이는 것마다 처량한 것은 무너진 집과 장항아리 등의 물건이 재 가운데 곳곳에 우뚝 서 있을 뿐 나머지 재민(災民)들은 임시 초부(草 )를 산 옆에 만들어서 머리를 모으고 묵묵히 앉아 원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전 가족이 함께 즐거워하던 옛터만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가끔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하루아침에 나의 청년과부가 웬일이며 슬하에 아들들이 고아가 무슨 죄인가' 하였다. 그 현장을 보고 들은 사람은 아무리 철석(鐵石)의 심장을 가졌다 해도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그 인근 한 촌에 또 참화가 있어 어떤 외국인에게 발견돼 아래에 기록한다.

서촌의 참경
"서촌〔원문에 서촌(西村)이라고 나오는데 수촌(水村)리를 말한다〕이라는 소부락은 제암리에서 십여리쯤 되는데 4월 17일 하오 4시에 촌락의 동구에 이르니 한 여인이 있어 몇마디 탐문을 주고받았더니 그 여인이 '당신은 기독교인입니까?' 하여 그렇다고 하자 내 손을 잡고서 '참화를 겪은 촌락에서의 이같은 상봉은 참으로 하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 전 촌의 인가와 교당은 불타 없어지고 많은 인민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참상을 와서 보십시오' 하였다.
다시 나아가 촌락을 한번 살펴보니 가옥 전 수 42중 8호가 겨우 남아 있고 건물 및 다른 저장물들은 모두 타 없어져 길가엔 재가 눈에 가득했지만 다시 무슨 참화를 어느 때 입을지 몰라 다시 짓거나 고치려 들지 않았다.
그 재해를 입은 날이 4월 6일인데 그날 새벽 전 촌락이 새벽 꿈도 깨기 전에 일본병사가 벌써 마을 안에 들어와 집 처마마다 불을 질렀고, 불을 끄는 사람은 총으로 쏴 촌민들은 그저 속으로 초초해 하면서 방관만 할 뿐이었다.
사상자를 자세히 조사한즉 한 사람은 즉사하고 기타 다수는 모두 중상을 입었는데 상처가 너무 지독히 참혹해서 차마 볼 수 없었다."

경관들은 교인들을 더욱 징벌
위에 기록한 것과 같이 일본병사와 순사가 나누어 해독을 준 것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으며, 북부조선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미국의 <콩그래순알> 잡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재하였다.

"시위운동의 개시일부터 정부 관리들, 특히 경관들은 기독교인에게 더욱 주의해서 교회의 목사·장로 및 직원들을 마음대로 체포해가 몇 주일간 감금과 심판을 치른 뒤 석방하고…… 또 길가는 사람이라도 일본병사와 순사가 교인 여부를 힐문하여 교인이라면 구타와 능욕이 아주 심했다. 또 당시 헌병·경찰이 촌민에게 경고하기를 '이제부터 기독교는 아주 없애버릴 것이요, 교회 안 집회는 금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민심을 실제로 조사해 보면 이번 운동은 전 조선의 모든 인민이 합심해서 한 것이지 어느 일부나 한두 단체가 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출전:남궁억, 朝鮮니약이 卷五, 56∼74면, 요약·정리:정영남)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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