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독립의 성지 보리울
선생의 낙향은 지금까지 알려져 온 바와는 전혀 다른 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선생의 전 생애를 통해서 나타나는 사상과 활동을 단순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이를 사실화한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커다란 손실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선생이 보리울을 인생의 마지막 무대로 정하고 낙향하신 것을 두고 심신이 지치고 병든 상태에서 이를 회복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자 물 맑고 공기 좋은 산골마을을 찾아 내려온 것으로 해석해 왔다. 선생과 유별한 사이로 교분을 나누던 이상재, 오세창 같은 이가 선생의 건강을 위하여 강권하였다는 이야기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주었으니 다른 설명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낙향 이전과 이후의 활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선생의 낙향이 단순히 심신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선생의 낙향은 당시의 상황에서 전개된 여러 방면의 독립을 위한 운동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운동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1912년 신민회 사건 이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면서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은 매우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해외로 망명하여 외교적 노력을 통해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거나 무장혁명투쟁을 전개하는 데 힘썼으며, 국내에 남아서는 제한된 여건 속에서나마 언론과 정치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그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기에 지금까지 서울이나 평양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려 했던 교육을 통한 노력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제 서울은 애국지사들의 한숨과 회의가 무력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때야말로 지금까지의 생활이 몸에 밴 서울을 떠나 "산골 민중을 일깨워 독립의 사상과 능력을 길러내야 할" 절호의 기회였다. 선생의 뛰어난 예지 앞에 이러한 성찰과 결단이 비켜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독립은 몇몇 지도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산골 민중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이런 선생의 생각은 이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독립신문>·<황성신문>·<교육월보> 발행 등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낙향을 결심하고 지어 부르신 "기러기 노래" 속에 이러한 심정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낙향과 함께 나타난 선생의 눈부신 활동은 이러한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낙향과 함께 숨돌릴 틈도 없이 즉시 사택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신 선생은 이듬해 9월 열칸짜리 예배당을 지어 4년제 보통학교를 시작하셨으며, 조선어 보충 , 동사략 , 조선이야기 등의 책을 써서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5백여 평의 무궁화 묘포장을 만들어 30만 주의 묘목을 전국의 사립학교와 교회를 통해 보급하셨다. 가평, 춘천, 홍천 등지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엡웟청년회를 만들어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모곡학교에서 시작한 독서운동은 춘천농고의 독서회와 춘천고의 상록회와 같은 민족운동이 도내 각 학교에서 일어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100여 곡이나 되는 노랫말을 지어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우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는데 이 노래들은 나오는 대로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새노래가 나오면 "보리울" 노래라고 할 만큼 선생의 애국적 가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1938년 이 노래들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나 아직도 찬송가에 실려 있어 애창되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과 "기러기 노래", "시절잃은 나비", "조선지리가" 등 10여 곡의 노래들을 이번 기회에 그 곡을 살려 소개하게 된 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라고 본다.
저녁이면 동민들을 모아 함께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으며, 그물을 만들고, 동그미를 만들고, 물레를 돌리는 가운데 민족심을 일깨워 주셨으며, 길곡리와 동막리를 엮어 권업사란 자치 조직을 만들어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면서 공동작업을 하며 학생들의 학비를 보조하는 적금을 하는 등 마을과 학교가 함께 민족의 미래를 열어가는 생활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셨다.
선생의 낙향은 실의에 빠진 한 애국적 선각자의 초라한 귀향이 아니라, 반도의 강산에 생기를 불어넣는 가장 이상적인 애국적 결단으로 결행된 독립운동이었다.
둘째로 선생의 낙향은 일제 36년 동안 국내에서 일제의 총칼에 맞서 굴복하지 아니하고 죽기까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신 불굴의 투쟁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육당 최남선, 동경 2·8선언문을 작성한 춘원 이광수와 같은 인물들이 친일행각을 통해 민족을 배반하는 변절자가 되었다. 국내에 남아서 선생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자세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한 지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의 지식인으로 심산유곡의 산골에 22년 동안이나 둥지를 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거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이요, 앞을 내다보며 일의 계획을 세워도 누가 이를 이해하고 동지가 되어 주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은 당시 선생을 모시고 함께 일하셨던 조용구 선생의 증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거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뜻한 바 일을 추진하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였겠는가!
선생은 이 모든 일들을 감내하시면서 뛰어난 창의력과 기발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의 회유와 총칼에 맞서 죽기까지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싸우시는 가운데 보리울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성지'로 가꾸어 가는 일에 전심을 다하여 자신을 바치신 것이다. 이런 선생의 모습은 선생이 직접 지으신 노래들의 가사와 저서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1) 선생이 직접 지으신 노래
기러기 노래
1. 원산(遠山) 석양(夕陽) 넘어가고 찬이슬 올 때
구름사이 호젓한 길 짝을 잃고 멀리가
벽공에 높이 한 소리 처량
저 포수의 묻 총대는 너를 둘러 겨냥해
2. 산남 산북 네 집 어디 그 정처 없나
명사십리 강변인가 청초우근 호수인가
너 종일 훨훨 애써서 찾되
네 눈앞에 태산준령 희미한 길 만리라
3. 곳간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 분 계셔 네 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는 양춘이요 고생 후는 낙이라
4. 만리장천 먼 지방에 묻 고난 지나
난일화풍(煖日和風) 편한 곳에 기쁜 생활 끝없다
여기서 먹고 저기서 자며
여러 동무 같이 앉아 갈대 속에 집 좋다
(1918)
이것은 선생의 낙향 목적이 요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노래요, 선생의 노래 중에 찬송가에 수록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만큼이나 널리 불려졌던 노래다.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더해지는 가운데 민족의 앞날은 아득하기만 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희망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크게 낙망하여 낙심하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노래하는 선생의 모습이 매우 자세하고 진하게 배어나는 노래다.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돋보이는 노래다.
자연을 배경삼아 전편에 흐르는 한편의 드라마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심사를 더없이 자극한다. 창자가 끊어질듯 애절한 마음이 온몸을 휘감을 때 길은 어둠에 잠기고 가을을 재촉하던 낙엽은 한겨울의 눈 속으로 스며들고 북풍한설 찬바람이 홀로 선 나그네의 심장을 멎게 한다. 바로 그 끝에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서 계신다. "엄동 후는 양춘이요 고생 후는 낙이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기쁨의 나날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선생의 발길을 한양에서 3백리 강원도 첩첩산중 걷고 또 걸어 높은 재로 사방이 가로막힌 이곳 모곡 땅 보리울 강신재 언덕 위에 무궁화 동산 민족의 내일을 밝히는 성지를 수놓게 한 것이다.
보리울로 낙향하면서 당신의 심사를 담았기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으로 혹은 해외로 전해져 매우 유행하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주일(모곡)학교가
1. 동막산과 강구비 앞뒤 둘렀고
모곡구역 모곡리는 우리 집이라
세상영화 누릴 자는 우리들이며
그 가운데 뜻부칠 손 주일(모곡)학교라
2. 금동여(錦童女)야 모여 서라 새동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어 입적한 우리
구주님 은혜를 더욱 감사해
천국낙(天國樂)도 바라보는 십자 동무야
3. 굳거라 너희 믿음 변하지 마라
마음과 뜻을 거룩하게 실행하여서
죽고 살고 화와 복을 상제께 바쳐
천당배를 타고 가자 우리 동무야
4. 주 예수 흘린 피로 죄씻음 받고
영생 소망 그네 줄로 기쁨을 삼아
싸워 이겨 저 언덕에 노래 부를 때
퍼지리라 온세상 하나님 나라
내로라 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의 길은 교육뿐"이라고 외치며 전국적으로 자고 나면 사립학교가 세워지던 시절 모곡교회 주일학교는 정식으로 모곡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유소년들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성서를 가르치는 동시에 간단한 한문과 산술 그리고 우리 역사와 영어 같은 교과목은 물론 애국적 사상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교회의 주일학교에는 교가가 있었다. 물론 선생이 직접 어린이들을 위해 지으신 노래다. 더없이 순진하면서도 복음적인 가사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생기가 넘친다.
우숭가(무궁화 동산)
1.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2. 백화가 만발한 무궁화 동산에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백천만 화초가 웃는 것같이
즐거워하라 우리 이천만
(후렴)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당시 학동들이 가장 즐겨 부르던 무궁화 노래다.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도 이 노래를 불렀고, 운동 시합이나 행진을 할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 특히 주일학교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반에 우승기를 줄 때도 이 노래를 불러 학동들의 기를 돋워주었던 우승가이기도 했다.
이런 애국적 내용이 듬뿍 담긴 노래, 어린이들의 마음에 비장하고도 그림 같은 시어로 민족심을 심어주는 노랫말로 된 이 노래는 조선주일학교 대회에 나갔을 때 율동과 함께 불러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1.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2. 봄 돌아와 밭 갈 때니
3. 곡식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 하러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1922. 9)
이 노래는 1928년 합동 찬송가에 수록되어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리며 때론 힘껏 불러대던 곡이다. 그 내용이나 표현이 너무 쉽고 대중적인 것이면서 새삼스런 맛이 있어 깊이 생각하고 부르지 않더라도 이 노래가 주는 감동은 대단한 것이다. 이 노래는 1937년 선생이 지은 모든 노래들과 함께 금지곡이 되었으나 이미 찬송가를 통해 활자화되었으므로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독립의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동기를 살펴볼 때 이러한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1922년 가을 어느날, 자리에 누우셨던 선생의 뇌리에는 보리울의 신비할 만큼 아름다운 산천과 꾸밈없이 뛰놀던 학동들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어찌하여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왜놈에게 짓밟히고, 죄없는 어린아이들은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가! 한시라도 빨리 나라를 되찾아 우리의 아이들이 맑고 밝은 모습으로 삼천리 금수강산 광복의 나라에서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결의와 다짐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선생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9장 37∼38절(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을 묵상하고 두 무릎을 꿇어 기도를 올렸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받으시고
젊어서 가졌던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왜정하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그리고 붓을 들어 쓰신 노래가 "봄 돌아와 밭 갈 때니(2절) 곡식 익어 거둘 때니(3절)" 독립을 확신하며 지으신 바로 이 노래이다.
조선의 노래
1. 금수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무궁화 화원에서 꽃피려 하는
배달의 어린 동무 노래 부른다 세상의 부러울 것 무엇이냐
2. 동천의 둥근 홍일 그 빛 찬란코 바다의 어별들의 양떼들같이
태극기는 창공에 펄펄 날리고 빛나게 잘살아라 우리의 조선
(후렴) 라리랐다라라 라리라리라 라리랐다라라 라리라리라(2회)
얼마나 힘차고 아름다운 노래인가! 이제 광복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생의 만년의 솜씨로 보여지는 이 노래는 "우승가"와 더불어 동심을 한껏 살려주는 독립의 노래다.
특히 이 노래는 선생의 하모니카 소리를 따라서 모든 학생들이 즐겨 애창하던 노래였으니 처졌던 어깨가 절로 올라가고 당장이라도 독립의 날이 도래하여 밝디 밝은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질 것 같은 희망을 심어주는 노래였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땅뺏기, 딱지치기, 고무줄, 술래잡기놀이가 벌어지는 곳마다 때로는 콧노래로 때로는 합창으로 이 노래가 신나게 불려졌던 것이다. "라리랐다라라 라리라리라 라리랐다라라 라리라리라"
조선지리가
1. 북편에 백두산과 두만강으로 남편에 제주도 한라산까지
동편에 강원도 울릉도로 서편에 황해도 장산곶까지
우리 우리 조선에 아름다움을 맹호로 표시하니 십삼도로다
2. 사천년 역사로 이어온 배달 거룩한 단군이 비로소 시사
삼천리 반도로 우리집 삼고 이천만 동포로 한집안 이뤄
우리 우리 조선의 광채로움을 문화의 도덕으로 빛내었도다
3. 산높고 물맑은 무궁화 동산 아름다운 경개로 장식하였고
기후좋고 기름지며 교통이 편해 세계에 자랑이 조선 반도라
우리 우리 조선의 유명하옴을 경계와 산물로 자랑하노라
4. 우리를 낳고 기른 반도 강산아 네 길이 복받고 무궁하여라
삼각산의 암석이 다 부서지고 양양한 한강물이 다 마르도록
우리 우리 조선의 아름다움을 일월로 한가지로 짝하리로다
일제는 우리나라 지도를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모양으로 그려놓고 일제의 침략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우리 민족의 국토마저 부정하려고 하였다. 일본 교과서의 이러한 작태를 본 선생이 이를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맹호가 뒷발로 만주 벌판을 내 차면서 앞발을 들어 일본 열도를 내리치는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이 노래를 조선의 지리로 엮어 부르게 하시고 또 호랑이 지도를 그려 교회 성탄절과 같은 행사 때에 강단에 걸고는 아동들로 한 사람씩 나와서 색칠을 하도록 함으로 이 나라가 5천년 역사의 천부적 능력이 있어 멀지않아 반드시 독립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아 조선의 강산을 노래한 곡이 바로 이 "조선지리가"이다.
선생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은 이렇게, 엉성한 듯하면서도 빈틈없이 엮어내는 멍석과 같이 어느 한순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철저하고 구체적인 것이었다.
시절잃은 나비
1. 일락은 서산에 황혼이 되고 바다와 온 우주는 캄캄하는데
옥토를 떠나서 어데를 향해 정처없이 어데를 향해 가느냐
애닲다 이천만의 고려민족아 너희 살길 바이 없어 떠나가느냐
2.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누구를 주고 자꾸만 떠나가느냐
정든 산천 고국을 등에다 지고 애닲은 눈물방울만 연해 뿌리며
두만강 푸른물결 건너서 가는 백의의 단군민족 내말 들어라
3. 무궁화의 화려한 금수강산은 우리들의 소유인 줄 너도 알건만
의식주의 핍박을 바이 못잊어 주린배 움켜 쥐고서 떠나가느냐
너희의 정경이야 차마 가긍하다 그러나 낙심 말아라 고려민족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지 10년이 지나자 일본인의 횡포가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구실로 집을 빼앗는가 하면 문전옥답을 빼앗기도 했다.
일제의 간교한 금융정책은 일본 사람은 누구나 신용보증만으로 대부를 받아 필요한 가옥이나 땅을 사서 재산을 불릴 수 있었지만 한국인은 담보물을 저당을 잡혀야만 돈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간교한 정책을 써서 거의 반강제로 일인의 재산과 숫자가 불어나도록 했던 것이고 이런 결과 얼마 가지 않아 전 국토의 80%가 저들의 소유로 넘어가는 착취와 수탈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과가 이러한 속에서 갈 곳을 잃은 백성들은 정든 땅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살길을 찾아 낯선 땅 북간도로 떠나갔다. 이것이 조선민중의 현실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 땅의 선각자,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선생은 조국에 남기로 작정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미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누군가 이 땅에 남아서 민족의 얼과 혼을 일깨워 독립의 힘을 기르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일이야말로 일제와 맞서 얼굴을 맞대고 어떤 수모와 박해라도 당장에 받아내며 감당해야 하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선생은 이 일을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마음의 뜻과 결심을 담아낸 노래가 바로 "시절잃은 나비"였다.
낮이면 학교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마을을 돌면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사랑방에 동민들을 모아놓고 함께 그물도 뜨고, 노끈도 꼬고, 동그미를 만들고, 짚신을 삼으면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들어 독립의 얼을 심어주시면서 이 노래를 함께 부르곤 하셨다. 이 노래가 모곡(보리울)의 하늘, 수시로 피어나는 물안개를 타고 넘어 삽시간에 전국으로 유행하는 애창곡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노래도 보리울에서 만든 노래라고, 어쩌면 이렇게 시름에 잠긴 이 백성의 마음을 애절하면서도 당당하게 담아 냈느냐며 신기한 듯 부르고 또 부르며 희망을 노래했다.
특히 2절과 3절에서 "단군민족, 고려민족"이란 표현으로 민족의 힘찬 기상과 기개를 담아 독립을 노래한 이 곡은 이 백성이 지금은 일제의 침략과 수탈 속에 잠시 수난을 받고 또 많은 백성이 망국의 한을 안고 조국을 떠나 있지만 그 옛날 만주벌을 달려 몽고까지 지배했던 '고려민족'의 기상과 기개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독립의 날을 소망하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한입 건너 두입으로 퍼져 전국민의 사랑을 받던 이 노래도 1937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낙원
1. 백두산 높이 솟아 펼쳐놓은 삼천리를
양강에 활개 벌려 장파절이 들렀구나
아마도 한라 높은 산이 아마 긴가 하노라
2. 무궁화 얼크러져 사시장철 봄나라
호미가 가는 곳에 젖과 꿀이 샘 솟거라
묻노라 낙원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조선의 일꾼
1. 피도조선 뼈도조선 이피 이뼈는 살아조선 죽어조선 내것이로다
에야디야 우리는 조선의 자녀 두팔뻗고 내닫는 조선의 일꾼
2. 아름다운 우리조선 삼천리강산 부딪쳐도 아니깨질 이천만무리
에야디야 우리는 선의 일꾼 기뻐뛰며 일하는 조선의 일꾼
삼천리강산
산에서는 금이나고 바다에 고기
들에서 쌀이나고 면화도 난다.
먹고 남고 입고 남고 쓰고도 남을
물건을 낳아주는 삼천리강산
물건을 낳아주는 삼천리강산
조선의 꽃
거친 산등성이 골짜기로-
봄빛은 우리를 찾아오네
아가는 움트는 조선의 꽃-
아가는 움트는 조선의 꽃
운동가
1. 잘 참고도 굳세다 철석 같은 맘 눈앞에 무슨 고난 못이길손가
활발코도 활발토다 우리 기상은 오늘날 청년계에 모범일세
2. 철망으로 꽉 눌러 앞길 장애와 두다리 질끈 동여 닫지 못하네
땅이라도 후벼파서 나갈 길 열고 두 동무 마주 잡고 빨리 닫세
3. 두 주먹 꽉 쥐고 힘써 다투매 한마당 일등상이 거 뉘 것일까
엎어져도 번쩍 서는 용맹한 내냐 뒤져도 힘 잘 쓰는 굳센 나냐
4. 풍진 속에 땀흘려 일장 운동에 잃었던 옛 정신을 다시 분발해
훌륭토다 우리 산천 내 흥 돋우고 일심한 우리 동포 의 좋도다
(후렴) 덕지체육 연단하여 동량지재(東樑之材) 이루세
인도정의(人道正義) 목적삼아 후일 공업(功業) 이루세
(후렴을 이렇게 고쳐 부르기도 함:나가세 나가세 앞만보고 나가세
나가세 나가세 일등상을 얻도록)
용사의 노래
쾌하다 우리 용사여 장하다 우리 용사야
승전고를 울려라 우승기가 날린다
이기기를 위하여는 우리생명 검불 같다
바치여라 있는 대로 애낄 것이 무어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번듯 번듯 우승깃발
우리 앞에 날린다 만세 불러라
우리 용사야 승전고를 울려라
우리 고함소리 천지가 동한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