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민족운동의 요람 상동교회

홍천자료실

남궁 억 선생 : 민족운동의 요람 상동교회

관리자 0 1,194 2020.03.31 10:12

남궁 억 선생 : 민족운동의 요람 상동교회

1905년 을사보호조약무효상소운동을 주도한 전국 감리회 청년지도자(엡웟청년회) 운동은 교회의 정치참여를 반대한 선교사 스크랜턴에 의하여 해체되고 만다. 이때 엡웟청년회를 대신하여 세운 감리교회 청년운동의 새로운 조직체가 바로 '상동청년야학원'이다. 이 학교를 중심으로 독립협회 시절부터 몸과 마음을 함께 했던 청년 지사들이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뜻을 모아 민족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상동교회는 신민회의 요람으로 당시 가장 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민족의 젊은 지도자들이 모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전덕기 목사는 독립협회 시절 이전부터 신앙심과 민족정신이 투철한 젊은 청년이었다. 그가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선생과 같은 분들의 지도를 받으며 마침내 상동교회의 목사로 내로라 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존경과 신뢰 속에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든 것은 감리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상동파로 불릴 만큼 이 학교를 중심으로 모여든 독립지사들의 면면을 보면 김구, 이동휘, 이동녕, 이준, 노백린, 안태국, 남궁억, 신채호, 최광옥, 차병수, 이승훈, 이상설, 최남선, 이상재, 최재학, 김진호, 양기탁, 주시경, 이용태, 윤치호, 이회영, 유일선, 이필주, 이승만 등으로 쟁쟁한 인사들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남궁억 선생은 1911∼1912년 사이에 있었던 신민회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된 전덕기 목사가 갖은 악형과 고문으로 폐인이 되어 더이상 재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동청년야학원의 원장을 맡아 그 빈자리를 채워 주었으니 선생은 신앙적으로나 독립운동가로서 당시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던 젊은 동지들의 맏형과 같은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상동청년야학원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당시 체육시간에 즐겨 부르던 노래 하나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 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
만인 대적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
절세 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닌가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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