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민중을 가르쳐야 한다
을사조약 이후 이에 통분하여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하고 이상설은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치는 등 우국지사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감리교회의 청년모임인 엡웟회는 이의 부당함을 설하는 상소를 올리고 죽기로 항거하자 하여 상동교회에 모여 전국대표자회의를 가졌으며 이를 위해 정순만의 인도로 맹세의 기도를 하고 나가 대한문과 경무청 앞에서 맨손으로 왜경과 맞서 싸웠다. 왜병 중대가 총을 발사하며 잡아가니 군중은 곧 피신하고 소수의 힘으로는 이를 감당할 길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상동교회에 모인 엡웟청년회 전국 대표들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석, 최재학, 계명륙, 김인집,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전병헌, 유두환, 김기홍, 김구 등이었으며 이때의 경험은 전국적으로 신교육운동이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었으니 이는 이미 민중의 자각과 사상적 무장만이 독립의 가장 확실한 지름길임을 천명하고 나가던 선생의 사상이 얼마나 정확하고 분명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엡웟청년회 회원으로 "을사조약무효상소운동"을 전개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아래 일지 속에서도 이러한 성찰을 엿보게 된다.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 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백범 김구선생의 일지, 196쪽)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