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양양 현산학교 설립이야기
군민의 관심과 기대가 아무리 크다 하여도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보아 산간 벽촌에 신식 학교를 세우고 이를 운영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한가지였다. 청년회를 조직하고 이 학교를 위한 후원회로 평의회를 조직했지만 모두가 비 협조적으로 모른 체 할 뿐이었다. 따라서 기부금을 모집하도록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이때 선생은 자신의 문중을 통해 기부금 4천환을 모아다 이를 기본금으로 학교를 설립하셨다.
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니 이번에는 입학을 자원하는 학생이 없었다. 호별방문을 통해 설득하여 보았지만 이도 여의치 않았다. 반 강제로 자녀가 있는 집마다 의무적으로 한 명씩을 보내도록 했지만 몰래 한문글방으로 내빼기 일수였다. 이들을 강제로 붙들어다가 가르쳐 보지만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민중을 가르쳐 일깨운다는 일이 이렇게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선생이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힘들게 꼬여가는 데는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관직을 가지고 있었던 유림학자 '정동현'이 선생의 개화사상을 깔보고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형리를 시켜 그를 데려다 묶어놓고 볼기를 치게 했다. "너 같은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가 이 꼴이 된 줄 모르느냐. 네 악몽이 깨도록 매우 칠 것이다" 하니, 그가 두 손을 저어 잘못을 뉘우치므로 풀어주고 함께 자리하고 손을 잡았다.
갖은 노력을 다하여 드디어 1906년 7월 20일 개학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입학생이 2백 명(11∼23살)이나 되었으니 오늘의 양양고등학교는 이러한 선생의 수고와 일념이 빚어낸 민족학교인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학교지만 학생들의 교재와 문구류를 조달하는 일도 큰일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수업료와 함께 교과서와 문구류 일체가 무상으로 주어졌다. 매년 새학기마다 교과서를 깨끗이 쓴 학생들에게 상을 주어 후배들에게 물려주도록 하였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의 둘째따님으로 윤치호의 자부였던 '자경' 씨의 당시에 대한 회상은 이런 단면을 보여준다.
"아버님이 양양 군수 시절에 혼자만 내려가 계셨는데 학교를 설립하시고는 교과서용 종이와 벼루, 먹 등을 서울집 마당에 사들여 쌓아 놓으시고는 손수 그 먼 시골까지 달구지에 실어가곤 하셨지요……."
이 학교를 위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헛되지 않아 당시 친일세력 일색이던 군내의 분위기는 학교를 중심으로 결집된 우국지사들의 참여로 활기를 띠게 되었고 마침내 이 학교 출신들이 주동하여 일으킨 이 지역의 3·1만세운동은 도내에서 가장 크고 치열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