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 선생 : 동사략 을 저술하다
초대 총독으로 건너온 데라우치는 무단정치로서 공연한 차별과 법문화(法文化)한 억압으로 용이하게 한국인의 민족성을 빼버리고 일본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봉기된 독립운동은 일본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계몽시켰다. 한국인이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 물적으로 드러나고 외국인에게 일본의 한국 통치에 대한 실력이 상실된 증거가 각 나라에 선전되매 일본은 당황하여 데라우치의 무단정치에 대한 실책을 고백했다.
제2대 총독으로 건너온 사이토는 무단정치를 버리고 문화정치를 표방했으나 사실상은 더 나은 것이 없는 기만정책을 썼다.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하겠다고 하여 교육령을 개정하고 일본인 학교와 같은 형식으로 하여 지방에 따라서 일본인과 공학할 수 있게 하면서 학생의 사상도 일본인과 차이가 없게 하려고 애를 써서 정신적으로 일본화시키려는 유도적인 교육정책을 썼던 것이다.
한국의 역사와 지리는 한일합병이 되면서 데라우치가 조선교육령을 내렸을 때에 벌써 교과목에서 빼어 버렸던 것이니 사회적으로 여론이 폭등해지매 무엇이라고 대답했던가!
"한국 역사와 지리는 조선어와 일어 속에서 가르치게 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는
"수업 연한 관계로 단독 과목으로 할 수 없다"
고 대답했는데 이는 이유가 될 수 없는 일이요, 일본 역사와 일본 지리를 배우면 그만이라는 말을 듣기 좋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에 한국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면 학교장에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도록 하는 방침이었으나 사립학교에서 일본인의 눈을 피해 가며 숨어서 가르친 교사도 있었다.
예를 말하자면 남궁억 선생이 배화학당에 재직했을 때 토요일 영문법 시간을 여학생들과 비밀히 약속하고 한국 역사를 교수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강원도 홍천의 보리울로 낙향하신 후에도 학교를 설립하고 계속하여 한국의 역사를 비밀로 교수하였다. 그때에 저술한 것이 동사략 이라는 사서였고 인쇄는 일제의 압박 밑에서 할 수 없으므로 비밀히 복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서 선생이 동사략 을 저술한 것은 1924년 겨울이었다. 동사략 은 4권으로 되어 있으며 제1권에는 단군 조선으로 신라 말까지였고, 제2권에는 고려 초로 여말의 공양 왕까지였고, 제3권에는 조선 초로 철종까지였고, 제4권에는 조선 대군주로 대한 융희 황제까지였고, 부기(附記)로서 3·1운동의 참황(慘 )을 기록하였다.
한서 선생이 동사략 을 저술함에 있어서 그 취지와 정신은 책머리의 범례(凡例)에서 원문을 가져다가 대신하고자 한다.
범례 초(抄)
② …… (상략) 신라 중엽 이래로 모화주의가 하도 팽창하여 그 수입된 허문욕례(虛文褥禮)가 너무 사람의 대의 정도(大義正道)를 마멸(磨滅)하므로 고사(古事) 중에 이러한 사건은 모두 산거(刪去)함.
③ 본서의 목적은 번다한 기사보다 권선징악이 더욱 중하므로 이 양의(兩義)의 사건은 그렇고 그 시말(始末)의 명세(明細)를 증저(證著)하고자 함.
⑤ 고래로 한문이 우리 국어가 아니므로 칭제 칭왕의 분별이 명확하지 않고 …… (중략) 수변(數變)하여 거서간이니 차차웅이니 이사금이니 마립간 등인데, 이조 조선의 한학자인 권근, 서거정은 이를 다 왕이라 하였으니 본서에는 김부식의 서예(書例)에 의하여……(하략)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동서양의 연대를 병기(幷記)하였고 고사를 인용할 때는 그 본문을 옮겨쓰되 독자의 편리를 위하여 한글로 토(吐)를 달아야 할 것을 이두로서 기록하였다. 물론 다른 사서에서 볼 수 없는 사건도 있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이지마는 3·1운동에 대한 기록에서는 오늘의 우리가 미치지 못한 사건의 기록이 있어서 더욱 이채로운 맛을 준다.
선생이 저술한 동사략의 총 페이지 수는 인찰지(印札紙)로 836페이지이며 그때 36부를 만들어 지방으로 비밀히 배부했다.
자료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서기념사업회
13-06-10 14:40